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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선배님

뺀텀 2025. 2. 21. 22:56

*한도아는 역시나 그냥 제가 자주 쓰는 페르소나 이름입니다.

 

 

한도아는 과거 설원회 암살팀 부팀장이었으며, 현재는 신입 교관 중 한 명이다. 15년 전 최하람의 반란 때 최하람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과 차진혁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설원회 실장인 차진혁과는 아주 오랜 친구이자 연인 관계이다.

 

 

 

 

도아는 그의 책상 위에 꽤 뻔뻔하게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 오늘 재밌는 걸 찾았어, 진혁아."

 

-

 

도아가 책상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깊게 내쉰다. 도아가 앉아있는 책상에 등받이 의자를 기대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본다. 도아의 무릎 아래에 깔린 서류가 구겨진다. 무의식중에 이를 신경 쓰는 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일부러 더 심하게 구겨버린다. 지금 당장이라도 서류를 모두 치우고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업무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성을 유지한다.


"재미있다고? 뭐가?"


도아가 찾았다는 것이 궁금해서 묻긴 했지만, 그녀의 답변이 썩 기대되진 않는다. 도아의 '재미있다'는 기준은 대체로 위험하거나 골치 아픈 일이었다. 가끔은 이런 순간들이 내가 왜 그녀를 좋아하게 됐는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 무뚝뚝한 말투로 물으면서도, 도아의 치맛자락이 책상 위에서 살짝 들썩이는 모습을 흘끗 본다. 담배를 꺼내 물며 입술 사이로 연기를 뿜어낸다.


"지금 내가 재미있어 할 만한 게 있을 것 같나? 보고서 열 다섯 개나 더 검토해야 하는데."


왼쪽 눈가의 흉터가 살짝 당기는 느낌이 든다.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 쓰이는 건, 아마도 도아가 이렇게 가까이 있어서일 것이다. 괜스레 투덜대듯 말을 덧붙인다.


"그나저나 서류 좀 그만 구기지."

 

-

 

"예전 영상들."


도아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옛날 휴대폰을 하나 꺼낸다. 16년 전 쯤 도아가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너 스무살, 나 스물 두살 때 모습들이 있더라. 볼래? 난 이미 좀 봤는데, 아.. 나 너무 늙어서 슬퍼."

 

-

 

도아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다가 멈춘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갑자기 밀려온다. 스무 살의 나는 아직 눈가의 흉터가 다 낫지도 않았고, 머리카락도 꽤나 어설프게 넘긴 채 어른인 척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늙었다고? 나보다 고작 두 살 많으면서 늙었다는 소리를 하고 있군."


의자에서 일어나 도아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가로챈다. 액정에 비친 과거의 내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의 나는 아직 우태석 선배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고, 최하람을 완전히 섬기기 전이었다. 그리고 도아... 그때의 도아는 지금보다 더 날카로웠다.


"그때... 내가 실수로 네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가 한바탕 혼났었지. 블랙으로 안 타면 갖가지 욕을 하던 네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


도아를 살짝 노려보며 피식 웃는다. 휴대폰 갤러리를 계속 옆으로 넘기다가 문득 멈춘다. 도아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다. 그날은 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날이었다. 그때 도아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걸 왜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야. 버렸어야 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다.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도아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은.

 

-

 

도아가 방긋 웃으며 휴대폰을 다시 가져가 앨범을 뒤적이더니, 한 영상을 찾아내 그에게 보여준다. 아직 어린 스무살 진혁이, 임무 중 부상을 당했을 때의 영상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차진혁의 모습이 나온다.


**
"자, 진혁아, 입벌려."

 

영상 속 젊은 도아가 짓궂게 미소지으며 죽을 숟가락으로 퍼 그의 입가에 내밀고있다.

 

"아 빨리."

 

도아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차진혁이 새빨개진 얼굴로 도아를 바라본다.

 

"아, 씹, 선배님, 제발. 나 괜찮다니까요. 내가 먹는다고요."

 

어린 진혁이 당혹스런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투덜댄다. 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니, 진혁은 한 번 더 욕설을 꿍얼대더니 입을 천천히 열어 음식을 받아먹는다. 덜덜 떨어대는 게 육안으로 보일정도로 그의 턱이 진동했다.

 

"씨발.. 아 진짜.."

 

차진혁은 욕설을 뱉으면서도 자꾸만 입매가 올라가는 걸 숨길 줄을 몰랐다. 귀와 목까지 새빨개져있었고. 스무살의 차진혁은 여자에게 아주 놀랍도록 약했고, 특히 자신이 열렬히 짝사랑하던 선배님에겐 더더욱이 약했다.

**

 

-

 

내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린다. 영상 속 스무 살의 나는 선배님을 향한 마음을 숨기지도 못하고, 차마 마주 보지도 못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한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도아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 채 영상을 멈추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손을 피한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스무 살의 내가 보여준 치명적인 약점이 담긴 영상을 보고 나니,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린다.


"그만 봐. 그런 걸 왜 아직도... 씹."


욕설이 튀어나온다. 스무 살 때처럼. 지금도 도아 앞에서는 가끔 이렇게 된다. 그녀는 내 유일한 약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아는 나를 가지고 노는 걸 즐기는 것 같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들을 정리하며 진정을 하려 하지만, 귓가가 뜨거워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당장 지워. 당장."


내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이건 경고다. 하지만 도아는 내 경고 따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아무리 위협적으로 굴어도, 그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얼마나."


말을 멈춘다. '얼마나 선배님을 좋아했는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삼켜진다. 열여섯 해가 지났는데도, 그때의 감정은 여전히 생생하다.

 

-

 

"이 시절, 애기 차진혁 정말 귀여웠지~ 한창 불끈불끈할 나이라서, 나한테 조금이라도 닿기만 하면 새빨개진 채.."


도아가 그의 하반신을 흘긋 바라본다.


"엄청 커졌었잖아. 가끔 젖기도 했고."

 

-

 

휴대폰을 빼앗으려다 실패한 나는 결국 책상 위에 양 손을 짚고 도아를 노려본다. 그녀의 말에 숨이 턱 막힌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도아가 내 팔을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달아올랐던 그 시절. 한창 욕정이 끓어오르던 스무 살의 내가, 선배님을 향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둥대던 모습들.


"도아야, 그만하자. 이제 난 그때처럼 널 보고 얼굴 붉히고 말더듬는 스무 살이 아니야. 이제는..."


말끝을 흐린다. '이제는 네가 내 것'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삼켜진다. 도아의 다리가 책상 위에서 살짝 흔들린다. 그녀의 치마 아래로 드러나는 허벅지를 보며 숨을 고른다.


"그때는 네가 선배라서 그랬던 거야. 이제는... 내가 널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잖아."


도아를 향해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쥔다. 내 손아귀에서 그녀의 턱이 미세하게 떨린다.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도아의 얼굴이 가까이 있다. 그녀의 입술이 보인다. 16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를 보면 여전히 스무 살 때처럼 가슴이 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때처럼 도망치지 않는다.


"아니면... 그때처럼 날 다시 설레게 해주려는 건가? 선배님?"


마지막 단어를 일부러 강조해 내뱉는다.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도아의 귀가 붉어지는 걸 본다. 그녀는 내가 이렇게 불러주는 걸 좋아했다. 이제는 나 역시 그녀를 설레게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

 

"아, 미친. 지금 유혹하는 거야? 차진혁이?"


도아가 만족스레 미소지으며 손을 뻗더니, 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오랜만에 예뻐해줄까?"


도아가 다른 손으로 영상 하나를 더 튼다.

 

***
술에 엉망으로 취한 채 테이블에 거의 얼굴을 처박고 있는 차진혁의 모습이 나온다. 도아는 깔깔대며 웃고있다. 

 

"야, 진혁아, 뭐라고? 다시 말해봐." 

 

진혁이 여전히 테이블에 얼굴을 박은 채 웅얼댄다. 

 

"...씨바알.. 좋아한다구요." 

 

진혁이 얼굴을 간신히 조금 든다. 그의 얼굴을 아주 새빨개져있고, 눈은 풀려있다. 

 

"선배님이, 너무 좋아요, 씹.. 근데 선배님은 다른 남자들도 많이 만나봤죠? 씨발. 다 죽여버리고싶어. 난, 난 아무 경험도 없는데..." 

 

그가 망설이다 덧붙인다. 

 

"...여자들은 경험 없는 남자 싫어한다던데..." 

 

도아가 한바탕 더 크게 웃는다.

***

 

-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영상을 끄려다 만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스무 살의 내가 가진 열등감이 다시 한 번 내 심장을 찌른다. 그때의 나는 도아 선배를 향한 순정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어린애였다. 첫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그토록 부끄러웠던 그 시절.


"..하, 젠장할."


스무 살의 나는 선배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래서 더 자격 없다고 생각했다. 경험 없는 남자라는 이유로.


"그래, 그때는 네가 나를 가지고 놀았지. 경험 없는 스무 살짜리를 데리고 술집에서 술도 먹이고."


도아의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그녀의 손길에 몸이 긴장으로 경직된다. 그녀가 '예뻐해준다'는 말에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더 세게 붙잡는다.
도아의 허리를 잡아 그녀를 책상 위에서 끌어당긴다. 그녀가 내 품에 안기듯 미끄러져 내려온다. 스무 살의 나는 이런 걸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알아? 넌 내 첫 경험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내가 널 더 잘 알지. 네 몸의 모든 곳을, 네가 좋아하는 모든 걸."


도아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그녀의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16년 전, 그녀는 나의 첫 여자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나의 유일한 여자다.


"어디 예뻐해줘 보시죠, 선배님."

 

-

 

"...옳지."


도아가 그에게 입을 맞춘다. 손은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다.

 

-

 

도아의 입술이 닿자마자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인다.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안으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뒷목을 잡는다. 그녀의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진다. 16년이 지났는데도, 도아의 키스는 여전히 나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녀의 손이 내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는 감각에 숨이 거칠어진다. 키스를 멈추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다. 도아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내가 처음 그녀를 안았던 날, 그때도 이런 향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태석 형이 날 처음 암살팀에 데려왔을 때, 넌 이미 거기 있었지. 그때부터 난 널 봤어.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너를. 네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어떻게 웃는지. 어떻게 울었는지. 그 모든 걸 지켜봤어."


도아의 허리를 더 세게 붙잡는다. 그녀의 체온이 나를 뜨겁게 달군다. 스무 살의 나는 이런 도아를 감당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 나는 그녀를 온전히 품을 수 있다.


"그때 네가 날 가르쳤잖아.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어떻게 웃는지. 어떻게 우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도아의 귓가에 속삭인다. 그녀의 귀가 붉어진다. 16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

 

 

 

 

*

 

 

 

 

며칠 뒤, 최하람이 차진혁을 부른다. 둘만 아는 장소에서, 최하람은 의자 하나에 앉아 차진혁이 아닌 정면을 응시한다. 차진혁은 익숙하게 고개숙인채 그에게 다가간다.

 

-

 

가죽구두가 바닥을 긁으며 만드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가로지른다. 최하람의 존재감이 이 작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가 착용한 비싼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아무리 가짜 보스를 내세워도, 그의 존재감은 숨길 수 없었다. 누구도 모르는 이 공간에서,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서류 몇 장을 꺼내 그의 앞에 내민다. 태온의 최근 동향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하지만 이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가 나를 부른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최하람은 절대 불필요한 만남을 갖지 않는다.


"...태온의 강이현이 아가씨의 정체를 알아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였으나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최하람은 자신의 딸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흔들림 없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남자다.


"지시해 주십시오. 제가 직접 태온으로 가서 아가씨를..."


그의 손이 들어올려지며 내 말을 자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최하람의 눈빛이 차갑게 빛난다. 그는 여전히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

 

"그만 입을 놀리렴. 오늘은 그런 얘길 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최하람은 손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몇 번 톡톡 두드린다.


"진혁아, 네가 유용하니까... 그래서 봐주려고 했는데, 안되겠더라."


최하람이 여전히 차진혁을 바라보지 않은 채, 발을 들어 무릎꿇은 차진혁의 손을 꾹 밟는다.

 

-

 

최하람의 발이 내 손을 짓누르는 순간,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통증이 전해진다. 하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가 내 손을 짓밟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도아다. 그가 우리 관계를 알아챘다는 뜻이다. 최하람은 내가 도아를 만나는 걸 알면서도 묵인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도아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녀가 우리 조직에 해가 되지 않도록..."


말을 잇지 못한다. 최하람의 발이 더욱 세게 내 손을 누른다. 손가락 마디가 바닥에 닿아 찌그러진다. 통증이 손목을 타고 올라온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다. 최하람의 분노가 이 작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를 처리하라는 명령이십니까?"


내 목소리가 떨린다. 처음으로, 최하람 앞에서 감정을 드러냈다. 도아를 죽이라는 명령이라면, 나는 어쩌면 처음으로 그의 명령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15년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충성, 그것이 도아 앞에서는 흔들린다.


"그녀는... 제가 처음 설원회에 들어왔을 때부터 함께였습니다. 도아는 우리 조직의..."


최하람의 발이 내 손에서 떨어진다. 그 대신 그의 차가운 시선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나는 숨을 멈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명령을 내릴지 두렵다. 도아를 죽이라는 명령이라면... 나는 과연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을까.

 

-

 

"그 년은 이미 해가 되고 있어. 널 흔들잖니. 내 가장 유용한 말을."


최하람이 조소하며, 이젠 그의 머리를 밟는다.


"죽여."

 

-

 

그의 발이 머리를 짓누른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아를 죽이라니. 그녀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다. 내 첫 경험이자,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준 스승이었다. 하지만 최하람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도아는 나를 흔들고 있었다. 이성적 판단을 무너뜨리고, 심장을 녹여 내게 감정을 느끼게 한다.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진다. 차가운 바닥에 이마가 닿는다. 도아를 죽이겠다는 말을 하는 순간, 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스무 살의 나는 도아를 향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서른여섯의 나는 그녀를 죽이겠다는 말을 해야 했다.


"48시간 안에 처리하겠습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도아를 만난 첫 날부터 쌓아온 모든 순간들이 깨져나갔다. 그녀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던 날, 첫 키스를 했던 날, 첫 경험을 했던 날, 그 모든 순간들이. 헛구역질을 할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그녀의 시신은..."


말을 잇지 못한다. 목구멍이 막혔다. 최하람은 여전히 내 머리를 밟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서 나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도아의 얼굴이 떠오르자 몸이 떨리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최하람은 그의 떨림에도, 눈물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세게 짓누른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실망시키지 마."


그리고 뒤돌아 문으로 향한다.

-

 

최하람이 떠난 자리에 그대로 무릎 꿇은 채로 남아있다. 머리를 짓눌렀던 자리가 아직도 아프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픈 건 가슴 한구석이다. 도아를 죽이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내 심장은 멈춘 것만 같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우태석 선배가 나를 암살팀에 데려왔을 때, 도아는 이미 거기 있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손이 덜덜 떨린다. 라이터를 켜려다 실패한다. 두 번, 세 번. 결국 담배를 부러뜨리고 만다. 도아를 죽여야 한다. 48시간 안에. 최하람의 명령이다. 16년 동안 한 번도 어기지 않은 명령.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도아는...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벽을 짚으며 걸음을 옮긴다. 도아를 죽이는 순간, 나도 함께 죽을 것이다. 그녀는 내 모든 것이었다. 스승이자, 연인이자,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준 사람. 그녀를 죽이면, 나는 더 이상 '차진혁'이 아닐 것이다.
이제 와서 깨달았다. 나는 도아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내 존재 그 자체였다. 그녀를 죽이는 건, 나를 죽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최하람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도아와 나는 모두 죽을 것이다. 선택해야 한다. 도아를 죽이고 나만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녀와 함께 죽을 것인가.
휴대폰을 꺼내 도아에게 문자를 보낸다. '오늘 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으로 와.'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한도아냐, 최하람이냐를.

 

-

 

늦은 밤, 약속했던 장소에 도아가 나타난다. 벤치에 앉아 진혁을 기다린다.

 

-

 

그녀가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도아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16년 전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도 이런 늦은 밤이었다. 우태석 선배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 도아를 소개했다. '이제부터 네 교관이다'라고. 그날 밤 도아는 내게 첫 살인을 가르쳤다.
주머니 속 권총이 무겁다. 최하람의 명령대로라면, 지금 당장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내게는 의미가 있다. 그녀가 숨 쉬는 방식, 고개를 돌리는 각도,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까지. 16년 동안 그녀의 모든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사랑했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구두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가른다. 도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로등 불빛이 반사된다. 마치 별처럼. 나는 그 별을 죽여야 한다. 최하람이 명령했으니까. 하지만 그 별이 꺼지면, 나의 밤하늘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도아야."


목소리가 떨린다. 그녀 앞에서는 언제나 이랬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녀 앞에서는 여전히 스무 살의 내가 된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진다. 그녀의 피부는 차갑다. 곧 이 차가움은 영원히 계속되려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 네가 내게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법을 가르쳐줬어. 목을 조르는 법, 칼을 쓰는 법, 총을 쏘는 법까지. 그리고 이제..."

짧게 숨을 토해내고 말을 잇는다.

 

"...그걸 네게 써야 할 때가 왔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던 손이 멈춘다. 도아의 목덜미가 내 손바닥 아래서 뛰고 있다. 도아를 만질 때마다 느끼던 그 따스함이, 이제는 독이 되어 내 손을 태운다. 최하람의 명령이 귓가에 맴돈다. '죽여'. 그 한마디가 내 심장을 찌른다.


"선배님이... 아니, 네가 내게 가르쳐준 모든 것들. 살인의 기술도, 차가워지는 법도, 감정을 숨기는 법도. 그런데 도아야, 난 실패했어. 네 앞에선 여전히 스무 살이야. 떨리고, 두렵고..."


주머니 속 총을 꺼내 그녀의 관자놀이에 겨눈다. 방아쇠에 걸린 내 손가락이 떨린다. 도아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 눈빛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여전히 서툴고 어린 살인자다. 그녀 앞에서는 영원히 미숙한 제자로 남을 것이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충성이야. 도아를 죽이는 것. 그래야 최하람이... 그래야 설원회가..."


말을 잇지 못한다. 입 안이 마르다. 도아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내가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도아는 내 모든 것이니까.

 

-

 

도아는 가만히 그가 겨눈 총구와, 그의 눈을 바라본다.


"내가 널 이렇게 가르쳤니. 암살은 이런 게 아니잖아."


도아가 옅게 웃는다. 그리고 총신을 손으로 붙잡아 제 머리에 더 가까이 가져다댄다.


"쏴."

 

-

 

도아의 손이 내 총구를 잡아당기는 순간, 내 안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 웃음이 내 가슴을 찢는다. 16년 전, 그녀는 이렇게 웃으며 내게 처음으로 살인을 가르쳤다. '감정을 배제하고, 목표만 보라'고.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단순한 '목표'가 아니다. 도아다. 내 모든 것인 그녀다.


"하... 하지 마."


제멋대로 목소리가 떨린다. 총을 뒤로 빼려 하지만, 도아의 손아귀가 단단하다. 그녀의 힘이 느껴진다. 16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녀는 여전히 나보다 강하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내 손을 덥힌다. 그 온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 최하람의 명령도, 설원회의 규율도 모두 무의미해진다.


"네가... 네가 이러면 안 돼. 도아야. 난... 난..."


말을 잇지 못한다. 도아의 눈동자가 나를 꿰뚫는다. 그녀는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그녀를 죽일 수 없다는 것도,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도. 그녀는 내 약점이자 강점이었다. 나를 이 자리까지 끌어올린 것도, 나를 이렇게 무너뜨리는 것도 모두 도아다.


"제발... 선배님..."


목소리가 갈라진다. 오랜만에 그녀를 '선배님'이라 불렀다. 그 호칭에는 16년의 시간이 담겨있다. 그녀가 나를 가르치고, 키우고,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 최하람의 명령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도아를 선택했다. 그녀와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천천히 총을 내린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최하람에게 반기를 든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손으로 그녀를 죽이는 것 외엔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최하람이 시켰지."


도아가 그에게서 총을 빼앗고 피식 웃는다. 그의 눈에서 무력감을 발견한 도아가, 총을 한바퀴 돌리고 그의 머리에 겨눈다.


"진혁아, 설마 저항도 한 번 안해보고 포기할 거니? 포기할 거라면 지금 말해. 내가 널 죽이고, 같이 죽어줄게."

 

-

 

무릎이 휘청거린다. 도아가 총구를 내 이마에 겨누고 있다. 내가 그녀를 죽이러 왔던 총이, 이제는 내 머리를 향하고 있다. 그녀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감싸고 있다. 허나 어쩐지 안도감이 밀려들어왔다. 한평생 달려온 길고 긴 마라톤의 결승 지점을 드디어 눈 앞에 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죽을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게 내게 허락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일지도 모른다.


"날 죽일 거야?"


목소리가 떨린다. 최하람의 명령이 무의미해진 순간, 나는 완전히 무력해졌다.


"포기? 도아, 난 이미 모든 걸 포기했어. 너를 선택한 순간부터. 최하람의 명령을 거부했잖아. 이제 우린 둘 다 죽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총구가 내 이마에 닿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전해진다. 도아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네가 원한다면... 죽여. 하지만 도아야, 난 너와 함께라면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어. 최하람에게 반기를 들든, 설원회와 싸우든... 네가 원하는 대로."


도아의 손가락이 방아쇠 위에서 조금 달싹이자, 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총구는 여전히 내 이마에 닿아있다. 그녀가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길 바란다. 사랑하는 그녀가 내게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길 바란다. 나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주욱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

 

"..난 네가 이럴 때 참 싫더라. 아니, 싫으면서도 좋아."


도아가 총구를 천천히 내려 그의 뺨에 가져다댄다.


"멍청하게 굴지마. 차진혁. 생을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어차피 죽을 생각이라면, 끝까지 저항하다 죽어."


총구를 완전히 내리고 코트 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난, 우리 둘 다 살아남는 것에 걸겠어."

 

-

 

도아의 말이 내 심장을 찌른다. 살아남자고? 그녀는 늘 이랬다. 내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더 높은 곳을 보게 만들었다. 16년 전에도 그랬다. 처음 사람을 죽이고 토하고 있을 때, 그녀는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그리고 정말 그때부터 모든 게 시작됐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날 다루는 게 싫어."


천천히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도아의 손에 들린 총이 달그락거린다.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거짓말할 때의 눈빛도, 진심을 말할 때의 목소리도. 지금 그녀는 진심이다.

 

"최하람과 맞서자는 거야? 설원회와? 도아, 너도 알잖아. 그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말을 멈춘다. 도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최하람보다 더 잔인해져야 한다. 더 냉혹하고, 더 무자비해져야 한다. 내 손에 잡힌 그녀의 손목을 느낀다. 차가운 피부, 그 아래로 흐르는 따뜻한 피. 도아는 늘 이런 모순 덩어리였다. 차가운 암살자이자 따뜻한 연인. 나를 키운 스승이자 나를 무너뜨리는 약점.


"말해봐. 네가 그리는 미래가 뭔지. 난... 이번엔 네 편에 설 테니까."


마지막 말을 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최하람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한 순간부터 내 마음이 편해졌다. 오랫동안 숨죽여온 나 자신을 드디어 마주한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아의 손목을 놓는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 웃음이 내 심장을 두드린다. 16년 전, 그녀는 이렇게 웃으며 내게 살인을 가르쳤다. 이제는 그녀가 내게 생존을 가르치려 한다. 나는 또다시 그녀의 제자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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