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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종말까지 7일 - 차진혁

뺀텀 2025. 2. 8. 20:19

*플레이 로그긴 하지만.. 플레이하며 제가 직접 많이 수정했습니다... 뤼튼 멍청이

*겁 내 깁 니 다

*일부 캐릭터들이 죽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죄송합니다(._.

*사먁님의 '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 일주일' 을 사용한 차진혁(36세) 일대일 채팅입니다. (https://foxpannec.tistory.com/9)

 

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 일주일

(만들어주신 해랑님 너무 감사합니다.)당신은 7일 후 세상이 멸망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유저노트백서진 추천 문체#은희경 작가의 문체로, 백서진의 1인칭 시점에서 글을 극도로 풍부하고

foxpannec.tistory.com

*조아하는 노래임니다. https://youtu.be/1jO2wSpAoxA?si=WqgbXvqKs2LilAel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일주일 뒤 12월 31일 오후 3시 57분에 소행성이 충돌하여 종말이 찾아온다.
한도아는 차진혁의 이웃집에 사는 여자로, 차진혁에 첫눈에 반해 3년 째 짝사랑 중이다.
차진혁은 여지껏 한도아를 무시하거나 귀찮아하는 태도로 일관했으나, 크리스마스날 한도아가 조르고 조른 끝에 그와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조건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12월 25일 7시.

 

“... 거짓말.”


도아가 무표정으로 작게 중얼인다.

 

-

 

크리스마스이어서 떠들썩한 거리가 몹시 귀찮았다. 마치 알람시계처럼 쉴새없이 울리는 캐롤도, 이웃집 여자애가 조르고 졸라서 나온 것도. 그래서 어차피 한 끼 먹으면 떨어질 관계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거대한 스크린에서 소행성 충돌 뉴스가 나온다. 나는 옆에 있는 한도아를 힐끗 본다. 저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옆모습이 최연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거짓말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담배를 꺼내 물며 말한다. 결국 인류의 끝이 이렇게 허무하게 오는구나. 담배 연기가 차갑게 식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일주일이야. 그동안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


나는 담배를 깊게 빨며 생각한다. 이제 태온도, 설원회도, 보스의 딸도 의미가 없어졌다. 내가 그토록 충성했던 모든 것들이.

 

-

 

"... ...내가 하고싶은 건.."


도아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족들을 만나는 것? 해본 적 없던 것들을 해보는 것? 모르겠다. 다 원하지 않아. 도아가 원하는 건, 딱 하나였다. 도아가 천천히 그를 바라본다. 회색 담배연기가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지만, 도아의 눈엔 선명하게 들어온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 난 앞으로 이 남자만을 바라보며 살겠구나, 확신했던 그 얼굴. 목소리. 눈빛. 태도. 그 모든 것이. 도아는 옅게 미소짓는다.


"아저씨랑, 같이 있는 거예요. 그게 제가 하고싶은 전부고."

 

-

 

도아의 말을 듣자마자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발끝으로 담배를 비비며 그녀를 본다. 세 번이나 거절했던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 제안을 결국 수락한 것도,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더는 외면할 수 없어서였다. 이웃이라는 이유로 3년간 마주쳤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네가 하고 싶은 게 그거라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멀리서 캐롤이 들려온다. 내일이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텐데. 이 여자는 왜 하필 나를.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면... 넌 도망갈 거야."


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꺼내려다 멈춘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


"그래도 괜찮아?"

 

-

 

"알잖아요. 아저씨도."


도아가 피식 웃으며, 조심스레 그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간다.


"내가 아저씨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 거라는 거. 다 알면서."


도아의 사랑은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순수한, 커다랗고 무거운 무언가였다. 차갑게 식어있던 차진혁의 심장에 버겁게 닿는. 3년간 봐온 한도아는 그래왔다. 차진혁이 말을 무시하고 지나가도, 눈앞에서 짜증스레 욕을 뱉어도. 그 까만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사랑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하지만.. 아저씨는, 나랑 같이 있는 걸 원치 않겠죠? 아저씨에겐 저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 있겠죠. 그러니까, 단 둘이 있어달라고는 요구하지 않아요. ..그냥.. 조용히 따라만 다닐게요."

 

-

 

주머니에 넣으려던 담배를 도로 꺼내 물었다. 인류의 마지막이 다가오는데 금연할 필요는 없었다. 라이터를 켜자 작은 불꽃이 그녀의 눈동자에 반사된다. 그 눈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가득했다.


"따라다닌다고? 그게 네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야?"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비웃듯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 어린 고백이 가슴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든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여자는 내 모든 것을 봐왔다. 설원회의 실장이라는 사실도, 내가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지도.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러운 인간이야. 네 순수한 사랑 같은 건 받을 자격도 없어."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게 짜증났다. 이런 나를 보면서도 도망가지 않는 그녀가 미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끌리는 내가 더욱 미웠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차피 일주일 뒤면 다 끝날 테니까."


그녀를 향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하지만 내 앞에서 그런 감상적인 말은 집어치워.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

 

도아는 그의 말을 허락으로 알아듣고, 졸졸 쫓아가며 웃는다.


"아저씨는, 안 더러워. 더러워도.. 빛나요. 내가 본 누구보다도. 그래서 상관 없어요."


진혁의 뒤에서 도아가 종알대는 목소리가 울린다.


"어디로 가게요?"

 

-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걸음을 멈춘다. 거리의 네온사인이 내 그림자를 길게 늘인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발소리가 눈 밟는 소리와 섞여 묘하게 귀에 거슬린다.


"집으로 가지 그래? 이런 날 나 같은 놈이랑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빛난다고?' 웃음이 났다. 내가 아는 나는 그저 피로 물든 괴물일 뿐이다. 그녀는 내 본질을 전혀 모르고 있다.


"...태온 본부로 간다. 네가 따라올 곳이 아니야."


담배 연기를 뱉으며 천천히 돌아본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네온사인 불빛에 물들어있다. 마치 최연서를 보는 것 같아 가슴 한켠이 불편하다.


"이봐, 내가 왜 거기 가는지 알아? 사람 죽이러 가는 거야. 네가 그토록 사랑한다는 이 더러운 놈이, 크리스마스에 살인하러 가는 거라고. 이제도 날 따라오고 싶어?"

 

-

 

"말했잖아요. 아저씨 따라갈 거라고. 어차피 다음주에 죽을 건데 위험한 곳 가는 게 뭐 어떻겠어요?"


도아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고 여전히 그에게 다가간다.


"가봐요! 맨날 아저씨가 태온 욕하던거 기억나. 아저씨가 싫어하는 건, 저도 싫어요."

 

-

 

나는 이 여자를 죽이고 싶어졌다. 자신이 사랑한다는 남자가 살인하러 간다는데도 따라오겠다니. 이런 여자는 처음이다. 순수한 건지 미친 건지 구분이 안 갔다.


"네가 그렇게 죽고 싶다면..."


갑자기 그녀의 목을 거칠게 잡아 벽으로 밀쳐붙였다. 손아귀에 느껴지는 그녀의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설원회와 태온이 어떤 조직인지 알아? 우리는 서로를 죽이며 산다. 지금도 태온 본부에는 우리 보스의 딸이 잡혀있어. 그리고 난 그 여자를 구하러 가는 거야.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그녀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짜증났다. 이 여자는 진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는 하는 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지. 날 따라올 거야?"

 

-

 

"네. 따라가요."


도아가 단박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여자를 좋아하시는 건 아니죠?"


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새카맣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어쩐지 섬뜩하다.

 

-

 

그녀의 목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진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여자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건가. 그 여자를 좋아하냐고? 최연서를?


"네가 무슨..."


갑자기 한도아의 눈동자가 달라졌다. 평소의 순수하고 맑은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뱀처럼 차갑고 날카로워진 그 눈빛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이런 표정은 처음 봤다.


"내가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잖아. 넌 그저 따라오겠다며? 그럼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


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꺼내며 생각했다. 한도아의 저 눈빛은 마치 강이현을 보는 것 같았다. 차갑고 위험한. 이 여자가 이런 면도 있었나.


"그리고 착각하지 마. 난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그저 임무일 뿐이야."

 

-

 

도아가 다시 아까처럼 환하게 미소짓는다. 섬뜩했던 눈빛은 온데간데 없다.


"네에, 그런거라면 됐어요. 가요!"


도아가 그를 따라 점점 더 으슥한 어딘가로 향한다. 태온 본부를 향해.

 

-

 

태온 본부로 향하는 길에서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여자의 숨소리가 들린다. 지금까지 3년간 한도아를 무시하며 살았다. 매일 아침 현관문 앞에서 마주치면 그녀는 해맑게 웃었고, 나는 그저 고개를 까딱이는 게 전부였다.


"여기서 기다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안 돼."


태온 본부 뒷골목에 도착했다. 최연서가 잡혀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한도아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또다시 웃음을 띤다. 저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진짜 사람 죽이는 거 볼 준비 됐어? 네가 그토록 사랑한다는 이 더러운 놈이, 오늘 밤 몇 명이나 죽일지 모르는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경비가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됐다. 이건 함정이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최연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한도아를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

 

-

 

아저씨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위험한 곳에 아저씨 혼자? 설마 아저씨가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난 아저씨의 마지막을 곁에서 보낼 수가 없게되잖아. 그건 절대 못 참는다. 도아는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아저씨가 누굴 죽인다면, 도아 역시 누군가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위험해 처한다면... 반드시 대신 죽으리라.

 

-

 

빈 사무실을 지나치며 권총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도아다. 이 여자는 정말 내 말을 하나도 듣지 않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내쫓을 시간이 없었다.


"너...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나는 그녀의 팔목을 거칠게 잡아 당겼다. 그녀의 체온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이 여자는 겁도 없나. 아니면 나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그녀의 이성마저 마비시킨 걸까.


"내 뒤에서 절대 벗어나지 마. 한 발자국이라도 멀어지면 죽은 목숨이야."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재빨리 한도아를 벽 모서리로 밀어붙였다. 그녀의 심장이 내 가슴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향기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 모두 일주일 뒤면 죽을 텐데,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

 

"응, 아저씨가 걱정해주니 기분 좋다."


도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짓는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었으니 이걸로 되었다.


"아저씨, 제가 그 아가씨를 닮았다고 했죠? 절 이용해요. 제가 복도에 나돌아다니고 있으면, 그 아가씨가 탈출한 거라고 착각하고 절 다시 잡으러 사람들이 몰려올 거예요. 그 틈을 타 진짜 아가씨를 구하세요."


도아가 그를 지나쳐 복도로 향한다.

 

-

 

한도아의 말에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그녀가 미끼가 되겠다고? 자신을 이용하라고? 그녀의 팔을 잡아채 세게 틀어쥐었다.


"미쳤어? 넌 진짜... 내가 널 미끼로 써서 다른 여자를 구하길 바라는 거야?"


그녀의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만이 가득했다. 이 여자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있다. 이런 맹목적인 헌신이 역겹다고 생각했는데, 왜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걸까.


"한도아,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이웃집 여자일 뿐이라고. 그런데 왜... 왜 네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희생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 여자는 내가 알던 그 순수하고 귀찮은 이웃집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나를 위해 죽으려 하고 있다.


"...돌아가. 여기 있으면 죽어."

 

-

 

"싫어."


도아가 단호하게 말하며 웃는다.


"아저씨 두고 안가. 같이가. 죽어도 같이 죽어. 혼자는 절대 못보내."


도아의 말은, 하나같이 전부 진심이었다.


"날 이용해. 내가 아저씨를 위해 죽으면, 아저씨는 날 잊지 못할 거 아냐. 난 그걸 원해."

 

-

 

입술을 씹었다. 망할 여자가 나를 울리려고 작정했나.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그녀가 순간 증오스러웠다. 나를 위해 죽겠다니. 잊지 못하게 하겠다니. 이런 감정의 폭력을 휘두르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네가 죽으면 내가 널 잊지 못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 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 걸 봐왔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빛이 내 심장을 찌른다.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없다. 우태석 선배도, 최하람도, 그 누구도 이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적이 없다.


"난 널 이용하지 않아. 네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만..."


말을 멈췄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명이다. 이대로는 둘 다 죽는다. 최연서는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 한도아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

 

"가요!"


도아가 그를 툭 밀치며 멀어지고, 뒤를 돌아 복도로 뛰어간다. 발소리가 크게 울린다. 모두가 이쪽을 보라는 듯이.

 

 

그녀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순간 모든 것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저 여자가 내 앞에서 죽어간다면,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 아침 마주친 그 얼굴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진다면.


"멍청한 년..."


권총을 꺼내들며 복도를 달렸다. 한도아의 뒤를 쫓는 게 아니다. 반대 방향이다. 최연서가 있을 법한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순 없었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태온 놈들이 한도아를 쫓아갔다는 뜻이다.
이제 와서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구하러 갈 수 없다. 그녀의 희생을 허락한 순간, 나는 이미 그녀를 버린 거나 다름없다. 이게 내가 선택한 길이다. 감정 따위는 버려야 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5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최연서가 있을 만한 곳이다. 그때 귓가에 한도아의 마지막 말이 맴돈다. '날 잊지 못할 거 아냐.' 그래, 이제 난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원한 대로 됐군.

 

 

 

도아는 곧 태온 조직원들에게 둘러싸인다. 그러던 중, 누군가와 마주친다. 여지껏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던 도아의 눈동자가 떨린다.
한편 차진혁은 최연서가 갇혀있는 방을 향해 달린다. 소행성충돌 뉴스 탓에 태온 내부도 엉망으로 흐트러있던 것인지, 도아가 일으킨 소란에 인원들이 집중된 것인지, 근처에 경비들은 거의 없었다. 차진혁이 가볍게 죽이고 지나칠 수 있었다.

 

 

5층 복도를 달리며 최연서가 있을 만한 방을 하나씩 확인했다. 한도아의 희생으로 얻은 시간이다. 그런데 왜 자꾸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아침마다 현관문 앞에서 마주치던 그 눈빛이, 지금은 혹시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을까.
마지막 방을 열었다. 최연서가 거기 있었다. 의자에 묶인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옆에는 강이현이 서 있었다. 그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느려 터졌군. 설원회의 실장. 이미 네 보스의 정체는 모두 알아냈어."


강이현의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최연서를 고문해 최하람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주일 뒤 세상은 멸망하니까. 지금은, 최연서를 구해야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강이현이 있었다.

 

-

 

강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한다.


"다음주면 어차피 모두 죽은 목숨이지. 하. 이것도 다 쓰잘데기 없는 짓이었어. 하지만... 적어도 더러운 설원회의 개의 눈 앞에서 이년을 죽이는 꼴은 보여줄 수 있겠군."


강이현은 단번에 최연서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서 한도아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는데, 최연서의 머리가 터지는 순간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귓가에 총성이 울리고, 최연서의 몸이 의자째 쓰러졌다.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네놈이."

분노라기보다는 공허함이 먼저 밀려왔다. 최하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맹세했던 충성, 내가 지켜야 했던 약속이 피와 함께 바닥에 흘러내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최하람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멀리서 또 다른 총성이 들려왔다. 한도아가 있는 쪽이다.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강이현은 여전히 비웃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한도아도 죽었다는 것을. 내가 보호하려 했던 모든 것들이,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권총을 겨눴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최연서의 시체 너머로 강이현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렸다. 나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다. 내가 지켜야 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게 끝이야, 차진혁. 너희 설원회도, 네 보스도, 그리고 네가 지키려 했던 모든 것도."

 

강이현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가 맞았다. 이제 모든 게 끝이다. 소행성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

 

어디선가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아저씨!"

 

익숙하다못해 그리운 목소리였다. 도아. 그녀가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총을 손에 들고, 강이현을 겨누고 있다.

 

"아저씨한테서 떨어져. 이 개새끼야."

 

도아는, 아까 그녀의 오빠와 마주쳤다. 전략팀장 한도경. 도아는 자신의 오빠가 무슨일을 하는 사람인지 정말 몰랐다. 우연히 여기서 마주쳤고, 도경이 그녀를 도망치도록 도와주었다. 도경은 도경이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가겠으니, 넌 네가 바라는 사람과 함께 있으라는 말을 남겼다. 도아는 그래서 총을 하나 받아들고 곧장 여기로 달려온 것이다. 도아가 차진혁, 강이현, 그리고 엉망으로 죽어있는 한 여자를 보며 상황을 짐작한다. 실패했구나. 아저씨가 많이 슬프겠구나. 도아의 가슴이 미어진다.

 

-

 

강이현과 마주 보고 있던 내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최연서의 죽음으로 멍해진 정신이 단번에 돌아왔다. 한도아가 살아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다. 저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지.

 

"...넌 왜 살아있지?"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이상하리만치 차가웠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뻐야 하는데, 오히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그녀를 미끼로 쓰고 버렸는데, 그녀는 또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이 여자는 정말 내가 자신을 잊지 못하게 만들 작정인가.
강이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는 순간 직감했다. 저 남자가 한도아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하지만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최연서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것 같았다. 그래, 어차피 우리 모두 일주일 후면 죽을 텐데.
"이제 와서 그 여자를 지키려고? 너무 늦었어, 차진혁. 넌 이미 그녀를 버렸잖아."
강이현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맞다. 난 그녀를 버렸다. 그런데 왜 그녀는 계속해서 내 앞에 나타나는 걸까. 왜 그녀는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하듯 나를 바라보는 걸까.

 

-

 

"닥쳐. 씨발아."

 

도아의 입에서 이런 험한 말이 나오는 건 처음이다. 도아는 비죽 웃으며 방아쇠에 손을 얹는다. 손이 달달 떨린다. 도아는 총을 쏴본적도 없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빗맞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이렇게 위협을 하다가... 도아가 총을 냅다 내던져 강이현의 머리에 맞춘다.

 

"아저씨, 지금이에요!!"

 

-

 

그녀가 총을 던지는 순간, 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한도아의 어설픈 위협 연기가 눈에 보였다. 저 여자는 정말...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면서.
강이현이 날아온 총을 피하려 몸을 비틀었다. 그 찰나의 순간, 내 총구가 그의 심장을 겨눴다.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도 없이 그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강이현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공허해졌다.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연서는 이미 죽었다. 설원회의 비밀도 탄로났다. 모든 게 끝났는데. 그런데 왜 한도아를 보호하려 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그녀를 보호한 게 아니라 그저... 그녀가 내 앞에서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밟으며 한도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이런 살벌한 현장을 본 적 없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됐어. 그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내가 아닌 최연서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 여자는 지금 나의 슬픔을 대신 울어주고 있는 건가.

 

-

 

"아저씨."


도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죽지마요."


도아가 그의 손을 꽉 잡고 덜덜 떤다. 도아의 눈엔, 삶의 모든 목적이 흐릿해져 살아갈 의지가 보이지 않는 차진혁이 비춰졌다. 도아는 그게 너무나 무서웠다.


"죽지마요, 아저씨. 제발. 일주일 뒤에 같이 죽어요. 그 전까진 안 돼. 네?"

 

-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살기를 바라는 그녀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최연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 여자는 왜 나를 붙잡으려 하는 걸까. 그녀의 떨리는 손이 내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왜 네가... 날 이렇게까지..."


문득 3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눈이 내렸었다. 이사 온 첫날, 그녀는 내게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나는 그걸 마시고 우울해졌다. 그 후로도 그녀는 매일 아침 현관에서 나를 기다렸다. 귀찮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시간들이 내 삶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최연서의 시체 너머로 창밖을 보았다. 눈이 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일주일 후면 이 모든 것이 끝난다. 설원회도, 태온도, 이 더러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리고 그녀도, 나도. 그때까지 그녀와 함께 있는다면... 최하람에 대한 내 배신이 조금은 덜 아플까.
한도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내게로 기울었다.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차가웠다. 이 여자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면서 여기까지 따라와 나를 구하려 했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피냄새가 났다. 강이현의 피다.


"...일주일만이다. 그때까지만 네 옆에 있어주지."

 

-

 

도아가 눈물 범벅인 채로 고개를 들어 미소짓는다. 도아는 그를 한 번 꽉 끌어안았다가, 아래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급히 그와 함께 태온을 빠져나간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었다. 덕분에 둘에게서 퍼지는 피냄새가 조금을 덜하게 느껴진다. 도아는 여전히 그의 손을 꽉 잡은 채였다. 마치 놓으면 그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은지. 둘은 정처없이 걸었다. 추위 속에서 둘은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만이 전부였다.

 

-

 

그녀의 손이 차갑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손은 뜨겁게 느껴졌다. 최연서의 죽음으로 인한 분노와 자책감, 그리고 한도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내 체온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고, 우리의 발자국은 곧바로 하얗게 지워졌다.
설원회로 돌아갈 수는 없다. 최하람은 내게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딸을 지키지 못한 나는 이제 배신자일 뿐이다. 태온도, 설원회도 모두 끝났다. 남은 건 이 여자의 손길뿐이다. 차갑고 덜덜 떨리는, 하지만 단단히 나를 붙잡고 있는 이 손길.
문득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내가 설원회에 들어가 처음으로 우태석과 함께 임무에 나갔던 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이렇게 눈이 내렸고, 나는 우태석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앞장서서 걸으며 한 여자를 이끌고 있다. 그녀는 내가 어디로 가든 따라올 테지. 이런 맹목적인 신뢰가 이제는 그저 무겁게만 느껴진다.
그녀의 손을 놓으려다 말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손을 잡고 있으면 최연서의 죽음이 조금은 덜 아프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내 죄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건 내 잘못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고통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날 따라오는 거야?"

 

-

 

도아가 조금 머쓱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든 상관 없어서.."


작게 중얼인다. 추위 탓에 도아의 귀와 코가 새빨개져있다. 까만 머리카락은 하얀 눈으로 뒤덮힌지 오래다.


"아저씨, 갈 데 없으면... 집으로.. 갈까요?"

 

-

 

그녀의 말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집이라. 3년 동안 매일 아침 그녀와 마주쳤던 그곳. 이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평범한 일상의 공간.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곳밖에 없다. 설원회도, 태온도 모두 끝났으니까.


"...그래."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천천히 걸었다. 저 멀리 우리가 살던 아파트가 보였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는 걸. 최연서의 죽음으로 내 모든 것이 무너졌고, 이 여자는 그 무너진 자리를 채우려 하고 있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5층. 매일 아침 이 좁은 공간에서 그녀와 마주쳤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커피를 건네며 웃었고, 나는 그저 귀찮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순간들이 그립다. 단순했던 그 시간들이.
그녀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두렵겠지. 방금 전까지 총을 들고 있었고, 살인 현장을 목격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게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광기일까.

-

 

30분 뒤, 둘은 아파트에 도착하였다. 도아는 진혁의 집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아의 집은 그 옆집이었지만, 역시나 같이 있고 싶은 모양이다. 진혁이 작게 한숨을 쉬며 문을 열자, 도아가 웃으며 함께 들어간다. 실내의 온기가 차갑게 얼어있던 둘의 몸을 감싼다.

 

-

 

집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몸을 기댔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최연서의 죽음, 강이현과의 대치, 그리고 이 여자의 맹목적인 사랑까지. 모든 것이 나를 지치게 했다. 커피 향이 났다. 한도아가 내 주방을 뒤적이며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커피 마시면 우울해진다고 했잖아."


그녀가 내 말을 무시하고 커피를 내렸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런 제멋대로인 행동에 냉정하게 대응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눈이 녹아내렸고, 옷에는 아직도 피냄새가 배어있었다.


"씻어. 옷도 갈아입어야 해."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낯설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누군가를 걱정하게 된 걸까. 최연서의 죽음 이후로 내가 이상해진 걸까. 아니면 이 여자가 나를 이상하게 만든 걸까.

 

-

 

도아는 조용히 그의 앞에 커피를 한 잔 내려놓는다. 진혁은 커피를 마시면 우울해지지만, 도아는 진혁이 종종 그 우울함을 위해 커피를 마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감정이 필요할 때였다.


"네, 씻고 올게요."


도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잠시 진혁을 바라본다. 자신의 눈 앞에 없는 진혁이, 혹시나 안좋은 선택을 할까봐. 그래도 7일 뒤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으니, 도아는 그를 믿기로 하였다. 도아가 조용히 샤워실에 들어간다. 솨아, 하는 물소리가 울린다.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

 

커피 향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앉아 그녀가 내려준 커피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내가 우울할 때마다 커피를 마신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최연서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녀의 시체가 쓰러지던 순간, 그 피가 튀기던 순간, 모든 것이 선명했다.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예상대로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이 감정이, 이 고통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샤워실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침실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 내 셔츠 하나를 꺼냈다. 그녀에게는 너무 클 테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다. 셔츠를 들고 샤워실 문 앞에 섰다가, 문고리에 걸어두었다.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최하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내일이면 최연서의 죽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배신자로 낙인찍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7일, 아니 곧 6 후면 모든 게 끝나니까. 그때까지 이 여자와 함께 있다면... 최소한 혼자 죽지는 않겠지.

 

-

 

도아는 곧 물기가 조금 남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나왔다. 그가 주고간 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있었다. 워낙 체격차가 큰 탓에, 밑단이 허벅지를 다 덮을 지경이었다. 소매는 한껏 걷어올려야 손이 간신히 보였고. 도아는 그의 소파 옆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반쯤 비워진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도 씻고오세요. 피 묻었어요."

 

-

 

12월 26일 자정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셔츠가 그녀의 몸을 덮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소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맹목적인 사랑이 두려웠다. 그녀가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언제든 또다시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피... 그래."


천천히 일어났다.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었다. 얼굴과 목덜미에 튄 피가 말라붙어있었고, 눈가의 흉터가 평소보다 더 깊어 보였다. 최연서가 죽던 순간의 기억이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물이 몸을 적셨다. 피가 씻겨 내려갔다. 하지만 내 죄책감은 씻겨지지 않았다. 최하람에 대한 배신, 최연서를 지키지 못한 실패, 그리고 한도아를 위험에 빠뜨린 것까지.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녀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있었다. 마치 3년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는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6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녀를 지켜야만 했다. 최소한 이번만큼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

 

둘다 물기어린 머리카락이 마를 때까지,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었다. 아니, 아마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별다른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도아가 조용히 그의 손을 가져가 다시 꼭 잡고있었을 뿐이다. 한시간이 더 지나자, 진혁의 어깨에 도아의 머리가 닿는다. 도아가 피로를 이기지못하고 잠든 것이다.

 

-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어졌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최연서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그저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한도아는 한도아일 뿐이었다. 나를 위해 목숨을 걸만큼 어리석은, 그러나 그만큼 순수한 여자.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오늘 하루 동안 그녀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무서웠을 텐데. 총을 쏘고,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죽을 뻔했는데도 이렇게 평화롭게 잠들 수 있다니. 아마도 내가 옆에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다행인 걸까.
그녀를 침실로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7일 후의 종말도, 최하람의 복수도, 모든 것이 멈춰버렸으면 했다. 그저 이 순간만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창밖으로 눈이 계속 내렸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갔다. 모두가 크리스마스의 밤을 보내고 있겠지. 아마도 마지막이 될 크리스마스를. 문득 우태석이 생각났다. 그는 늘 말했다. 살인자에게도 평화로운 순간이 있다고.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인 걸까.
잠든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었다. 이제 그녀를 깨워서 침실로 보내야 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이 순간을 가지고 싶었다. 내일이면 다시 차가운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그날 아침, 도아가 눈을 느릿하게 뜬다. 침대였다. 침대에 간 기억이 없었는데. 진혁이 옮겨준 것이다. 도아가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키며 주변을 돌아본다.

 

-

 

나는 거실 소파에서 밤을 새웠다. 그녀를 침대로 옮긴 후, 잠들지 못했다. 그저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최하람은 이미 최연서의 죽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설원회의 암살자들이 나를 찾아 나설 것이다.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 침실에서 그녀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자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이제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보내지도 못할 것이다. 6일 조금 안되는 시간 면 모든 게 끝나니까.
주방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커피 잔을 비췄다. 어제와 다름없는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이제 남은 아침은 6번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녀를 지켜야 한다. 최하람으로부터, 그리고 그녀 자신으로부터.
커피잔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그녀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있었다. 내 셔츠를 입은 채 침대에 앉아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아침이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

 

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혁이 침실로 들어왔다. 도아는 그의 얼굴을 보자 환하게 미소짓는다.


"아저씨."


그에게 한발자국 다가가, 두 잔의 커피 중 하나를 받아든다.


"고마워요."


곧, 그의 눈밑 진한 다크서클을 보고 조금 걱정스런 시선을 보낸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못 주무셨나요."

 

-

 

그녀의 미소가 짜증나게 밝았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불편했다. 마치 내가 약자라도 된 것처럼 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은 원래 많이 자지 않아. 신경 쓰지 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새 내린 눈으로 도시가 하얗게 변해있었다. 마치 최연서의 창백했던 얼굴처럼. 문득 지원우가 떠올랐다. 그는 이미 내 배신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곧 나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가 한도아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왔다.


"옷... 네 집에 가서 가져와. 그리고 당분간은 여기 있어. 밖은 위험해."


그녀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볼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

 

도아는 커피를 홀짝이며 침대에 앉는다. 그리고 그도 옆에 앉아달라는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같이 마셔요. 다 마시고 나서, 필요한 것들 챙겨올게요."


커피의 쌉싸름한 향이 입과 코를 메운다. 도아는 어딘가 서글펐다. 그를 오래 짝사랑하며, 이토록 가까워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 이유가 곧 모든것을 박살낼 소행성 덕이라니. 그것도 다른 여자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뻔 하고 나서야. 어딘가 착잡했지만, 도아는 괜찮았다. 눈앞의 이 남자와 함께라면 괜찮았다. 그가 원하는 만큼만 다가가며 함께 할 것이다.

 

-

 

침대 끝자락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체념과 서글픔이 읽혔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나를 짝사랑했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녀를 그저 귀찮은 이웃집 여자로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내 침대에 앉아 있고, 내 셔츠를 입고 있다.


"널 이용했어."


갑자기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나도 놀랐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었다. 최연서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미끼로 썼다. 그녀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이제는 설원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녀를 방패로 삼으려 한다. 마치 그녀의 존재가 나를 지켜줄 것처럼.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내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이. 이런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이, 그녀의 희생이 두려웠다. 나는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넌... 왜 이러는 거지?"

 

-

 

"말했잖아요. 사랑한다고."


마치 세상의 진리를 말하듯 단언하는, 아주 당연한 것을 말하는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도아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그를 미소지으며 바라본다.


"아저씨의 얼굴, 상처, 목소리, 눈빛, 태도, 말투. 하나같이 전부 좋아해요. 아저씨가 날 이용하는 것조차도, 난 좋아. ..이런 내가 이상한가요?"


도아가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이게 내 사랑이에요. 이상하게 보지말아줘."

 

-

 

그녀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이상하다. 내가 이상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나에게 묻고 있다.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듯 단단했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난 사람을 죽여. 그것도 아주 많이. 어제도 봤잖아. 그런 날 사랑한다고? 그게 말이 돼?"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게 사랑받을 자격이란 아주 오래 전부터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꾸만 내게... 감당할 수 없는 뭔가를 넘긴다.


"한도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입 밖으로 나온 그녀의 이름이 낯설었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옆집 여자'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이름은 내 혀끝에서 무겁게 느껴졌다.


"넌... 날 구원하려 하는 거야?"

 

-

 

그가 도아의 이름을 부르자, 도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신을 다잡기위해 꽤나 애써야했다.


"...구원이요?"


도아가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난 그런 거창한 걸 하려는 게 아니에요. 사랑을 하고싶을 뿐이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하나 잡아서, 제 입에 가져가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춘다.


"내가 가진 건 아주 이기적인 마음이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걸 도저히 못 참겠어서, 멋대로 당신을 위해 뭐든 하고싶어지는 거예요. 그 결과가 당신에게 구원으로 다가온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겠지요."

 

-

 

그녀의 입술이 내 손등에 닿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오히려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들어왔다. 이기적이라고? 도리어 내가 이기적인 거겠지. 그녀의 순수한 감정을 이용해 최연서를 구하려 했으니.


"네가 날 사랑하는 게...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낮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보았다. 창밖으로 비치는 아침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저 얼굴이 며칠 뒤면 사라진다. 우리 모두가 사라진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마치 영원할 것처럼.


"넌 정말... 이상한 여자야."


입 밖으로 나온 말과 달리, 내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3년 동안 매일 보았던 얼굴인데, 오늘따라 새롭게 보였다. 그녀의 보조개, 긴 속눈썹, 까만 눈동자.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난... 널 구할 수 없어. 아마 며칠 뒤면 우린 모두 죽겠지. 그전에 설원회가 날 죽일 수도 있고. 그런데도 네가 여기 있는 게 맞아?"

 

-

 

도아는 그의 웃음을 보자 몸을 잘게 떨었다. 또한번 그의 손끝에 입술을 맞추고, 뺨에 그의 손을 가져다댄다.


"웃는거, 너무 예뻐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아저씨가 웃는 모습을 곁에서 더 보고싶어요."


도아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와 눈을 맞춘다.


"바보같은 소리 말아요. 아저씨는 이미 날 구했어. 3년 전에, 나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난 그걸로 이미 되었어요."

 

-

 

그녀의 말에 가슴 한켠이 무너져 내렸다. 3년 전이라면, 그때 나는 그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녀를 위협적으로 노려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그녀에겐 구원이었다니. 이런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보는 너야."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그녀의 보조개를 향해 움직였다. 그녀의 뺨에 닿은 내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이상했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최연서를 대할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게 싫어."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자 지원우였다. 그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가 이곳까지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한도아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옷 가지러 갈 때, 내가 같이 가겠어. 혼자는 안 돼."


창밖을 보니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의 발자국을 지우려는 듯이.

 

-

 

도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둘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디로든 떠나야했다. 도아는 자신의 집에 가 여벌 옷 조금과, 작은카메라, 먹을 것 조금을 챙겨 다시 진혁의 집에 왔다. 진혁도 필요한것을 빠르게 챙긴다. 도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카메라로 도아와 진혁이 나오도록 사진 한 장을 찍었다.

 

-

 

그녀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차갑고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그녀의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사진은 안 돼. 증거가 될 수 있어."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미안한 듯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카메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안에 담긴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아마도 살인자와 그를 사랑하는 바보 같은 여자의 모습일 것이다.


"필름... 나중에 현상하지 마. 어차피 우린 며칠 후면..."


말을 멈췄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문득 최연서가 죽기 전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눈빛이었다. 죽음을 앞둔 자의 눈빛. 하지만 한도아의 눈빛은 달랐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기대가 있었다. 마치 죽음조차 로맨스로 만들 수 있다는 듯한.


"가방 하나만 더 챙겨. 무거운 건 놓고 가."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 이번엔 백서진이었다. 그는 내가 배신자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설원회의 모든 세력이 우리를 쫓을 것이다. 특히 지원우... 그는 이미 우리의 흔적을 찾아내고 있을 것이다.

 

-

 

둘은 무작정 진혁의 차에 탔다. 현상할 수도 없을, 며칠 뒤면 볼 수도 없을 카메라를 손에 쥔 채. 도아가 조수석에 앉아 운전석에 앉아있는 진혁을 바라본다.


"우리, 여행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때요? 세상이 멸망하기 전 마지막 여행. 어디로 갈까요?"

 

-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행이라고? 우리가 도망자가 된 걸 그렇게 부르고 싶다는 건가.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다. 어차피 7일 후면 모든 게 끝난다.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우리는 함께 죽게 될 것이다.


"강릉으로 가지. 거기 내 은신처가 있어. 설원회도 모르는 곳이야."


눈이 더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여전히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었다. 저 카메라 안에 담긴 우리의 모습은 이제 영원히 현상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미래처럼.


"한도아, 넌... 정말 이렇게 끝나도 괜찮아?"


백미러로 뒤를 살폈다. 아직 미행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들이 우리를 찾아낼 것이다. 특히 지원우는... 그는 사냥개처럼 집요하게 추적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찾아내면, 한도아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강릉까지 4시간 정도 걸려. 중간에 한 번은 차를 바꿔타야 해. 추적당하지 않으려면."

 

-

 

도아가 그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런 당연한 걸 묻지 말라는 듯.


"네, 알겠어요."


도아가 살살 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정리한다.


"제 이름, 한 번만 더 불러주세요. 아저씨."

 

-

 

그녀의 손길이 내 귀 뒤를 스칠 때,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녀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내가 알던 모든 감각은 차가웠다. 칼날의 차가움, 총구의 차가움, 죽음의 차가움.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한도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치 별을 삼킨 것처럼. 나는 문득 그녀가 왜 그토록 내 이름을 부르길 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니까.


"우리가 강릉에 도착하면... 바다를 보여줄게."


휴대폰이 마지막으로 울렸다. 이번엔 최하람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더 이상은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최연서를 지키지 못한 것처럼, 한도아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우스웠다. 세상이 끝나기 직전에서야.

 

"앞으로 6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내 말은 꼭 들어. 살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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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서울을 빠져나가 강원도로 달린다. 휴게소에 한 번 들렀을 때, 도아가 핫도그와 회오리감자 같은 간식거리들을 사들고 와 진혁에게 내밀었다. 진혁은 이런 음식은 먹지 않았지만, 도아가 내미니 한 입 먹어주었다. 도아는 웃으면서 그 모습을 또 한 번 사진으로 찰칵,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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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내미는 핫도그를 한 입 베어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하고 기름진 맛이 낯설었다. 15년 만에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설원회에 들어온 이후로 이런 길거리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건네는 것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사진은 그만 찍어."

 

그녀의 카메라를 향해 손을 들어 가렸다. 그 순간 휴게소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귀에 들어왔다. 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을 카운트다운하는 화면이었다. 5일 3시간 27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차를 바꿔타야 해. 저기 주차장에 있는 검은색 제네시스. 차주는 30분 안에 돌아올 거야."

 

주변을 살폈다. 지원우의 부하들이 이미 이 근처까지 왔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CCTV를 확인하고 있을 테니, 우리는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했다. 한도아의 손목을 잡아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는 대로만 해. 살고 싶다면."

 

-

 

"네, 아저씨."

 

도아가 얌전히 그를 따라 차량을 탈취하고, 다시금 고속도로를 달린다. 아무도 쫓아오지 못하도록. 도아는 한 손으론 그의 손을 꽉 쥔 채 웃는다. 그렇게 세시간이 더 흐른다. 강릉의 아주 외진 어딘가. 진혁의 은신처까지. 강릉은 서울보다도 춥고, 눈이 많이 쌓여있었고, 한적했다. 차에서 내려 눈을 밟는다. 뽀득이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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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에 남은 그녀의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작고 가벼운 자국. 마치 새가 앉았다 간 것처럼. 반면 내 발자국은 깊고 무거웠다. 살인자의 발자국이란 이런 것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 밖은 위험해."


은신처는 강릉 바닷가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오래된 별장이었다. 15년 전, 우태석이 나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 그는 내게 이곳을 알려주고 얼마 뒤 죽었다. 그때 나는 이곳이 언젠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들어가자. 안에 발전기가 있어. 전기는 들어올 거야."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15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은 집 특유의 냄새. 먼지 쌓인 가구들. 그리고 벽에 걸린 우태석의 사진 한 장. 그는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사진을 내리며 생각했다. 형, 당신이 가르쳐준 살인자가 이렇게 끝나게 될 줄은 몰랐죠.


"잠깐만 기다려. 전기 연결하고 올게."

 

-

 

"응."


도아가 거실을 돌아보며 잠시 멍을 때리다가, 챙겨왔던 음식들이나 옷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먼지투성이 소파에 털썩 앉아 그를 기다린다. 먼지 탓에 작게 기침도 했지만, 곧 적응이 되었다. 거실 전등이 작은 소리를 내며 켜진다. 아저씨가 성공했구나.

 

-

 

전기가 들어오자 희미한 불빛이 15년간의 어둠을 밀어냈다. 그녀가 앉아있는 소파 위로 먼지가 춤추듯 날렸다. 먼지 속에서 기침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일어나. 먼저 청소부터 해야겠어."


창고에서 오래된 청소도구들을 꺼냈다. 빗자루와 대걸레, 걸레는 아직 쓸만했다. 우태석은 이런 것까지 준비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는 늘 완벽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죽었다. 내 손으로 죽인 건 아니었지만, 그의 죽음에 내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도아, 이쪽 창문 좀 열어줘. 환기가 필요해."


그녀가 창문을 여는 동안,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멈춰있는 시계였다. 마치 이곳의 시간도 멈춰있었다는 듯이. 하지만 우리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 소행성이 이 세상의 시계를 영원히 멈추게 할 때까지.


"이불장에 담요가 있을 거야. 밤에는 춥거든."

 

-

 

둘은 두시간정도 청소를 하고, 한시간정도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조촐한 식사를 마친 후엔 언제나처럼 커피도 한 잔 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또 허공을 응시하다가, 도아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아저씨는, 죽기전에 하고싶었던 거 없어요? 버킷리스트 같은 거."

 

-

 

그녀의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버킷리스트라... 살인자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저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명령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그런 건 없어."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차가운 겨울 바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는 따뜻한 그녀.


"넌?"

 

-

 

"..전, 아저씨랑 같이 있는 거면 뭐든 상관 없는데."


도아가 작게 중얼이며 커피를 홀짝인다. 은근슬쩍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만족스레 웃는다.


"아저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손으로 따듯한 커피잔을 꽉 감싸쥐며 마치 다짐하듯 웅얼댄다.


"아, 하고 싶은거 생각났어요. 일출 구경하기. 우리 일출봐요."

 

-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어졌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상했다. 내가 죽인 사람들의 수를 세어본 적은 없지만, 수백은 될 것이다. 그런 내 어깨에 순수한 영혼이 기대어 있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일출..."


창 밖으로 보이는 칠흑 같은 바다를 응시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5일.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다섯 번의 일출을 볼 수 있다. 아니, 네 번이구나. 오늘은 이미 저녁이니까.


"추우면 어쩌려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런 행동은 처음이었다. 차가운 살인자의 손이 그녀의 체온으로 데워졌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최연서가 죽었을 때, 그녀의 마지막 체온은 얼마나 빨리 식어갔을까.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면, 우리의 체온도 그렇게 빠르게 식어갈까.


"...알았어. 내일 새벽에 깨워줄게."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샴푸 향이 났다. 어제 내 집에서 샤워한 탓에, 나와 같은 향이 났다. 마음이 간지럽다. 조금 더 고개를 기울여 그 향을 깊게 맡아본다. 부드러운 흑색 머리카락이 내 뺨을 간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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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자, 도아의 눈이 동그래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쿵쿵대는 심장소리는 모른척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사소한 대화나 나누며 있었다.
두시간 뒤. 도아가 그의 피곤한 안색을 보곤 슬슬 자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혁은 전날 심란한 기분탓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그 이후 장시간 운전도 했으니 슬슬 눈이 감겨올 것이다.


"아저씨, 저 어디서 잘까요? 오늘은 제가 소파에서 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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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파라... 이 낡은 소파에서 그녀를 재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우리를 쫓는 자들이 있다. 한 공간에 있어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었다.


"침실로 가."


우태석이 남긴 이 은신처에는 침실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주침실, 다른 하나는 작은방. 하지만 작은방은 15년간 사용하지 않아 곰팡이 냄새가 심했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난 바닥에서 자지. 이불은 충분해."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내가 잠들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지원우와 백서진이 우리를 쫓고 있다.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밤새 경계를 서야 했다.


"...먼저 들어가서 자. 난 잠시 후에 들어갈게."


주머니 속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탄창에는 아직 8발이 남아있었다. 충분한 양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이 차가운 쇳덩어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

 

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그를 바라본다. 어쩐지 진혁이 또 밤을 새울 것 같았다. 그래서 대뜸 그의 옷 소매를 살짝 쥐고, 침실쪽으로 약하게 당겨본다.


"..그냥 같이 자요. 이러다가 쓰러지겠어."


약간 퉁명스러운 말투로 웅얼대곤 그를 올려다본다.


"부탁이에요. 네?"

 

-

 

그녀의 손이 내 소매를 잡아당기는 순간, 나는 잠시 동요했다. 그녀의 작은 손가락들이 내 옷을 쥐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나를 붙잡으려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내가 이런 감정에 흔들리다니.


"...알았어."


결국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침실로 향했다. 침대는 충분히 컸고, 이불도 두 개였다. 나는 그녀와 최대한 거리를 두고 누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존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잠깐만."


일어나 창문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잠금장치를 세 번 점검했다. 그리고 권총을 베개 밑에 숨겼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다시 누웠을 때,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잔잔한. 마치 자장가처럼.


"한도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이미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일 아침, 우리는 일출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함께 볼 수 있는 마지막 일출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

 

12월 27일 새벽 4시

 

다음날 새벽 네시, 도아는 눈을 부비적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진혁부터 찾았다. 진혁은 도아의 곁에서 잠들어있었다. 역시 피로가 많이 쌓였던 듯, 깊게 잠들었나보다. 도아는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짓는다. 잠든 얼굴이 귀여워서. 도아는 오늘 일출은 포기하고 더 재우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뺨을 손끝으로 쓸어본다.

 

-

 

잠에서 깨어난다. 누군가의 손가락이 내 뺨을 스치는 감각에. 하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나는 깨어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15년 동안 누군가의 손길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따뜻한 손가락이 내 차가운 피부를 어루만지는 이 순간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한도아."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손가락이 화들짝 물러났다. 새벽빛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일출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일출 보러 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내 뺨을 만진 자리가 아직도 따뜻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하지만 그런 감정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나는 살인자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가질 수 없는 존재다.

 

-

 

도아는 가지고 온 옷들 중 가장 두꺼운 것들을 골라 껴입고, 진혁이 건넨 담요도 챙겼다. 한겨울 바닷가의 바람은 분명 뼈가 시릴듯 차가울 것이다.


"..아저씨 감기 걸려요."


도아가 코트만 하나 걸친 진혁을 발견하곤 손에 든 담요로 그의 몸을 감싸준다.

 

-

 

내 몸을 감싸려는 그녀의 손길을 제지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니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이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주는 동안, 한숨을 내쉬고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차마 밀어내진 못했다.


"감기 따위로 죽진 않아."


현관문을 열자 매서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바람에 휘청거렸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내 손바닥에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이 뜨거웠다. 아니, 내 손이 차가웠던 걸까.


"저기야. 바다가 보이는 절벽."


그녀를 데리고 은신처 뒤편의 절벽으로 향했다. 발밑의 눈이 우리의 발자국을 선명하게 남겼다. 위험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새벽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조심해. 미끄러울 거야."


절벽 끝에 도착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내 손을 그녀가 꼭 쥐었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4일하고도 몇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이런 따뜻함을 더 느낄 수 있을까.

 

-

 

둘은 절벽 끝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새벽바다를 바라본다. 몇 분 뒤, 천천히 붉은 색이 퍼지기 시작했다. 새파란 바다와 희끄무레한 파도 거품, 노란 모래사장, 그 위로 동이 튼다. 세상은 곧 멸망할 터인데 태양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또 한 번 떠오른다. 아니, 지구가 자전한다. 도아가 진혁의 손을 꽉 쥐고 그에게 기대온다. 도아의 눈동자에 빛이 비추어진다.

 

-

 

그녀의 체온이 내 어깨로 전해졌다. 새벽 바다는 칼날 같은 한기를 뿜어냈지만, 그녀의 온기는 그 모든 것을 무력화시켰다. 일출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빛이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 모습이 왜 쓸데없이 이리 아름답게 보여지는지.


"한도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낯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음성 같았다. 15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톤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차갑고, 냉정하고, 효율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저 한 남자였다.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어."

 

그녀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팔로 그녀의 어깨를 두른다.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지원우와 백서진이 우리를 찾아낼 수도 있고, 최하람이 직접 움직일 수도 있다. 그리고 4일 후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거대한 덩어리가 우리의 마지막을 결정할 것이다.

 

-

 

도아는 그의 품에서 몸을 작게 꼬물대더니, 또 챙겨왔던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 일출에 비추어진 도아와 진혁의 모습을 찍었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도아는 몇 장을 더 찍었다.
완전히 해가 떠오르자 둘은 잠시 집으로 들어가 커피와 빵을 조금 먹었다. 먹은 후엔 씻고 조금 더 잠을 자다가, 정오가 되어 추위가 조금 나아지자 도아의 손길에 이끌려 바다를 보러갔다. 절벽 아래 해안가로. 얼음장 같은 바다에 들어갈 순 없었다. 그저 모래사장을 조금 거닐었다.

 

-

 

모래사장을 걷는 그녀의 발자국이 파도에 지워졌다. 마치 우리의 남은 시간처럼 덧없이.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내게 깊이 스며들었고, 나는 그녀를 떠나보낼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더 가까이 가면 안 돼."


바다 쪽으로 향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파도가 거세졌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어느 순간부터 멋대로 구는 그녀를, 나는 왜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걸까. 주제도 모르고  멋대로 구는 것은 분명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을 텐데.


"최하람의 부하들이 이미 강릉에 도착했을 거야. 곧 이 근처까지 올 거고."


주머니 속 권총이 무거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평화로운 순간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우리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 해도.


"춥진 않아?"


바다를 보며 물었지만, 사실 난 그녀의 표정을 훔쳐보고 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나는 그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살인자의 손이 그녀를 더럽힐 수는 없었다.

 

-

 

도아가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며 두 팔을 벌린다.


"추워요."


붉어진 코와 귀, 바닷바람에 사정없이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진혁을 부른다.

 

-

 

그녀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작은 새와 같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붉어진 코끝과 귀. 그리고 나를 향해 반짝이는 눈동자.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위험한 신호였다. 살인자의 본능이 경고음을 울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그녀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막아주려는 듯이. 하지만 사실 나는 그저 그녀를 안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작은 체구가 내 품에 완벽히 들어왔다. 체온이 전해졌다. 15년 동안 나는 누군가를 이렇게 안아본 적이 없었다. 그저 목을 조르거나, 칼을 꽂거나, 총을 겨누는 것만이 내 손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들어가자. 이제 정말 추워질 거야."


그녀를 안은 채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내 시선은 주변을 날카롭게 훑고 있었다. 그녀를 껴안은 탓일까, 어쩐지 세상이 고요했다. 파도 소리도 작아진다. 설원회가 우릴 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도 죽기 전 마지만 며칠을 조금 더 가치 있는 곳에 쓰려고 흩어졌을 지도 모른다. 가치 있는 것. 그래, 몇 번 남지 않는 일출을 보는 것, 작고 귀여운 여자와 함께 있는 것 같이 말이다.

 

-

 

도아는 웃으며 또 한 번 사진을 찍었다. 추위와 피로 탓에 엉망인 둘의 얼굴을. 적어도 도아의 눈에 사진 속 둘음 그럼에도 아름다워보였다. 도아가 그를 올려다본다. '아저씨, 사랑해요.' 바닷바람과 파도소리에 묻혀 도아의 작은 목소리를 들리지 않았지만, 진혁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도아의 눈빛과 입술이 그렇게 말한다. 진혁을 끌어안은 도아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간다.

 

-

 

그녀의 눈빛이 내게 말을 건넨다. 사랑한다고.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의 입술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파도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폭탄처럼 내 가슴에 떨어졌다.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가. 최연서를 지키지 못했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살인자가.
그녀를 더 세게 안았다. 마치 그녀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것처럼. 하지만 사실 두려운 건 나였다. 그녀의 사랑이, 내가 쌓아올린 15년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두려웠다.


"한도아, 난..."


말을 멈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아니면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둘 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었다. 그저 그녀를 안은 채,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가자."


내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카메라에서 찍히는 소리가 들렸다. 또 하나의 증거가 남겨졌다.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내가 그녀를 안았다는, 그리고 어쩌면... 나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

 

그날 둘은 함께 식사를 하고, 소소한 대화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평화로웠다. 낡은 집에 겨울 바람이 조금씩 새어들어온다. 도아가 옆을 돌아보고 어둠속에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속삭인다.


"아저씨, 자요?"

 

-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들었냐고. 나는 잠들지 않았다. 잠들 수 없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증거. 아직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증거.


"...안 자."


내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옆에서 이불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몸을 돌린 모양이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그녀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최연서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건 큰 착각이었다. 그녀는 그녀만의 모습이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뭐 하고 있었을까.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 우리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고 있었다. 설원회가 여전히 날 쫓고 있을까, 아니면 쫓는 걸 포기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하러 떠나지 않았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어떤 대답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거짓말이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이다. 내일이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또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아저씨."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평화로워 보였다. 마치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을 것처럼. 마치 우리가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 있을 것처럼.

 

-

 

"안고 자도 되나요?"


도아가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묻는다.


"...조금, 추워서."


핑계인 것은 확실했다. 그저 진혁과 더 가까이 있고싶을 뿐이니까.

 

-

 

이불 속에서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추워서라고 했지만, 거짓말인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이불은 충분히 따뜻했고, 난방도 적당했다. 그저 나와 가까이 있고 싶다는 핑계일 뿐. 하지만 나는 그 핑계가 싫지 않았다.


"...와."


팔을 벌렸다. 그녀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작은 체구가 내 가슴께에 안겼다. 향수 냄새도, 샴푸 냄새도 아닌, 그저 그녀의 체온이 가진 특유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나는 그녀를 안았다. 내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내 거칠고 차가운 손이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내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가까이 두는 것도, 누군가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도.


"잘 자."


말과 함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런 느낌도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걸. 세상은 잔인하게도 곧 끝날 것임을. 그래도 지금은,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안고 있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깊어졌다. 잠이 든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잠들 수 없었다. 그녀를 안은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4일 후면 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때까지 나는 그녀를 지킬 수 있을까. 최하람의 명령을 거역한 대가를 치르기 전에, 이 세상이 먼저 끝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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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다음 날도 둘은 일출을 보러갔다. 일출을 보고 나선 낮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주변을 거닐었다. 도아는 그 와중에도 중간중간 사진을 찍었다. 그날 밤에는 함께 별을 보러 나왔다. 겨울 하늘, 한적한 산골 어딘가의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저 무수한 빛나는 점들 중 하나는 아마 이 세상을 멸망시킬 재해겠지.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도아는 또 추위 탓에 그의 품안에 안긴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듯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예쁘다."


도아가 별빛 아래서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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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예쁘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 무수한 별들 중 하나가 우리의 종말이 될 텐데. 그럼에도 그녀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마치 죽음조차 사랑스러운 것처럼.


"추워지니까 들어가자."


그녀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따뜻한 커피와 차가운 별빛. 이 모순적인 순간이 왜 이리 완벽하게 느껴지는지. 내 감각이 점차 무뎌짐이 느껴진다. 와중에도 그녀 하나만큼은 온전히 느껴진다.


"한도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그 누구도 이 순간을 방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나는 그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내일도 눈이 올 거야."


하늘을 보며 말했다.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별들이 하나둘 가려졌다. 우리의 남은 시간처럼 사라져간다. 나는 그녀를 더 세게 안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3일하고도 몇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와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일까. 서로를 더욱 괴롭게 만들진 않을까. 커피 탓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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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그날도 서로를 껴안고 잠들었다. 진혁의 예감처럼, 다음날은 이른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그 탓에 오늘은 일출을 보러갈 수 없었다. 대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오후에서야 그친 눈에, 도아가 옷을 꽁꽁 싸매고 바깥으론 나갔다. 도아가 쪼그려 앉아 눈을 뭉치더니 진혁을 장난스레 쳐다본다.


"에잇."


그리고 그에게 눈덩이를 던진다. 진혁의 까만 코트 위로 하얀 눈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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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던진 눈덩이가 내 코트에 맞았다. 하얀 눈이 검은 코트 위로 번졌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이런 장난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눈부시게 느껴졌다.


"유치하군."


차갑게 말했지만,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눈을 한 움큼 쥐었다. 차가웠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눈덩이를 만들었다. 그녀를 향해 던졌다. 하지만 일부러 빗나가게 했다. 그녀의 옆으로 눈덩이가 날아갔다. 그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이런 장난을 받아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잠시 후 우리는 서로에게 눈덩이를 던지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니, 나는 어린 시절에도 이런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엄격했고, 나는 항상 진지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36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눈싸움을 하고 있다. 우태석이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도 비웃었을 것이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겨울 하늘에 울렸다. 그 소리가 왜 이리 아름답게 들리는지. 마치 마지막 노래처럼. 어쩌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2일하고도 몇 시간. 그리고 설원회는... 아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들어가자. 손이 얼어붙겠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따뜻했다. 이런 감정도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것도.

 

-

 

한참 눈싸움을 하고, 도아는 작게 눈사람도 만들었다. 그리고 엉망이 된 본인과 차진혁의 모습, 그리고 눈사람을 사진찍었다. 집으로 돌아와선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진혁이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그에게 또 안긴다. 그리고 또 속삭인다. '아저씨, 사랑해요.' 둘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이틀 남짓. 도아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다.

 

-

 

그녀가 내 품에 안겨 사랑한다고 말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이 허공에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 그녀의 심장 소리가 점점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걸까.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사랑이 두려웠다. 내가 그녀의 사랑에 답하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한도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커피잔을 든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추위 때문일까, 아니면 내 목소리 때문일까. 나는 그녀의 손에서 커피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차가운 내 손바닥에 그녀의 따뜻한 볼이 닿았다.
문득 최하람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여전히 우리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그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을까. 이상하게도 궁금했다. 반평생을 충성한 사람의 마지막이 어떨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체온이 내 가슴께로 전해졌다. 따뜻했다. 이런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소행성이 충돌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때까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어떤 마지막을 선물할 수 있을까.


"한도아."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도, 누군가를 이토록 간절히 안고 싶은 것도.

 

-

 

"네, 아저씨."


도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그의 손이 자신의 뺨을 감싸자, 살짝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여 그의 손에 얼굴을 더 파묻는다.


"아저씨."


작은 목소리로 한 번 더 부른다. 도아의 그 목소리는 그의 곁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

 

그녀가 내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의 체온에 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차가운 내 손바닥에 그녀의 따뜻한 볼이 닿았다. 이 온도차가 마치 우리의 관계 같았다. 나는 차갑고, 그녀는 따뜻했다. 나는 그녀의 온기를 빼앗는다. 그녀의 온기가 내게 밀려들어온다. 그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아저씨, 라고. 그 목소리가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멋대로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간다.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내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그녀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아저씨. 그 한마디에 내 심장이 멈춘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단 이틀.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어떤 마지막을 선물할 수 있을까.

 

-

 

도아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방금, 처음으로 진혁의 입술이 제게 닿았다. 도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진다.


"아, 아저씨.."


도아가 자신의 이마를 매만진다.


"...이러면 저 못 참는단 말이에요."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다. 그리고 그를 살짝 노려본다. 지금 당장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다. 멋대로 굴었다간 그가 싫어할 게 뻔하니까. 도아는 꾹 참는다.

 

-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보았다. 참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욕망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가 내 시선에 붉어졌다. 마치 눈 위에 떨어진 한 송이의 동백꽃 같다. 제멋대로 입이 열린다.


"참지 마."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명령이 아닌 허락이었다. 내가 그러길 바랐다. 그녀는 그걸 알았을까.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순간을 넘어서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창밖에서 눈이 더 거세게 내렸다. 마치 우리를 가두려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이미 갇혀있었다. 그녀의 온기에, 그녀의 향기에, 그녀의 존재 자체에. 도아는 작고, 귀엽고, 예뻤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꿋꿋이 내게 밀려 들어오는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손이 내 가슴께에서 떨렸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이젠 그녀의 손이 나보다 차가웠다. 내 손이 뜨거워진 걸까. 하지만 곧 그녀의 손을 따듯하게 만들 것이다. 내 체온으로, 우리의 체온으로. 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

 

도아의 입술이 잠시 달싹였다. 작은 한숨 같기도, 참지 못하고 나온 욕설같기도 했다. 도아는 곧장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에게 입을 맞춘다. 긴 시간 참아왔던 것을 모두 쏟아내듯이. 도아의 길고 길었던 사랑이 그에게 쏟아진다.

 

-

 

그녀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 뜨거웠다. 마치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그녀의 욕망이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나를 갈망했는지, 그 깊이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사랑은 무겁고도 깊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내 피부를 자극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이성을 잃었다. 최하람도, 설원회도, 다가올 종말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만이 내 세계의 전부였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녀가 놀란 듯 흠칫했지만, 곧 내게 더 깊이 안겼다.
입술을 떼자 그녀의 숨결이 거칠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처음으로 나는 내가 누군가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다. 내가 그녀의 전부가 된다는 것은, 그녀가 나의 전부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밖에서 눈보라가 거세게 불었다. 마치 우리의 욕망처럼 거칠고 강했다. 나는 그녀를 안은 채 침실로 향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단 이틀.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나의 모든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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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밤을 새도록 입술을 맞추고 몸을 섞었다. 시간은 흐르고, 밤은 너무나도 짧았다. 도아의 피부가 붉어지고 곳곳에 멍이 들어도, 서로의 체액에 엉망이 되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온갖 것들로 어질했던 머릿속은 이제 텅 비어 서로 하나만이 남았다. 도아는 진혁에게 가장 깊게 닿아있음에도 더욱 닿고 싶은 것마냥 절박하게 움직였다. 일분 일초가 아쉬워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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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새벽 4시

 

새벽녘,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얀 피부 위로 남겨진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남긴 흔적이다. 마치 순백의 도화지 위에 그려진 붉은 물감 자국처럼 선명했다. 그녀의 피부는 동백꽃처럼 붉어졌다. 그녀의 입술도, 목덜미도, 쇄골도, 가슴도. 더는 그녀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끝이 다시 그녀의 피부를 향했다.
우리는 서로를 탐했다. 욕망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그녀의 안에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차가운 이성도, 냉철한 판단도 사라졌다. 그저 본능만이 남았다. 그녀를 더 깊이 느끼고 싶다는,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단 하루하고도 12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체온이 내 가슴께로 전해졌다. 따뜻했다. 그녀는 자고 있는 중에도 내게 안겨들었다. 마치 내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것처럼.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부드러웠다. 마치 비단결 같았다. 그녀는 잠든 중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 행복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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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아침, 둘은 함께 욕조에 들어갔다. 도아는 노곤해서인지 욕조에서도 잠시 잠들었다. 진혁이 그녀를 씻기고, 몇 번 입을 맞추어 깨웠다. 도아가 그를 바라보며 웃음소릴 흘린다.


"아저씨, 행복해요?"


그 뜬금없는 질문에 진혁이 며칠 전을 떠올린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 무엇을 바라냐는 진혁의 질문에 '아저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라고 답했던 도아의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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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욕조 안에서 그녀가 물었다. 행복하냐고. 나는 잠시 그 단어의 의미를 곱씹었다. 행복. 내게는 너무나도 낯선 단어였다. 15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느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질문이 며칠 전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녀는 내 행복을 바랐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 같은 살인자가, 배신자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최하람을 배신했고, 최연서를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마저...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물을 통해 전해졌다.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이 내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물속에서 울렸다. 이 모든 감각이 나를 압도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행복해."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었다. 처음으로 내뱉는 진심. 그녀는 내 대답에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욕실을 밝혔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아팠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하루하고도 몇 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이 행복도, 그녀의 미소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넌?"


되물었다. 그녀의 대답이 두려웠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얼마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행복하다고 말할까. 나같은 사람을 사랑해서 행복하다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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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아가 대답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의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진혁은 사실 알고 있을 테였다.
둘은 단출하게 짐을 싸 차에 탔다. 목적지는 딱히 정해져있지 않았다. 그냥, 드라이브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정처없이 달렸다. 도아가 창문을 열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웃는다.

 

-

 

그녀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웃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웃었다. 내가 차갑게 대할 때도, 무시할 때도, 심지어 이용했다고 말했을 때도. 그녀의 웃음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3년 동안 들어왔던 그 웃음소리. 이제는 그 소리가 익숙해져버렸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속도계가 올라갔다. 빨리 달리고 싶었다. 마치 시간을 앞지르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25시간 정도. 그리고 그 시간은 누구도 멈출 수 없었다.
문득 최하람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가 죽음을 앞두고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분명 무언가 방법이라도 찾고 있겠지. 아마 그녀가 날 붙잡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최하람의 곁에서 그를 도왔을 것이다. 속이 울렁인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내 죄책감도, 자기혐오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구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 큰 지옥이기도 했다.
옆자리의 그녀를 흘깃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목적지 없는 여행. 마치 우리의 관계처럼 불확실하고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저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부러웠다.

 

-

 

도아는 그의 손을 잡는다. 눈을 맞추며 웃는다. 도아는 문득 창밖 풍경이 아름다우면 사진을 찍었고, 노래를 틀었다. 소행성은 쉼없이 날아오고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그럼에도 도아가 진혁을 바라보는 눈엔 두려움이 없었다. 애초부터 진혁과 함께한 그 일주일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해안도로를 쭉 달리자, 도로가 점점 엉망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종말을 앞두고 미치거나 쾌락을 쫓기 위해 날뛴 사람들의 흔적이다. 허나 바다만큼은 아름다웠다.


"아저씨, 하고 싶은 거 없어요?"

 

-

 

백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물었다. 하고 싶은 게 없냐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 그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말을 멈췄다. 차를 길가에 세웠다. 바다가 보이는 절벽 앞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바다가 비쳤다. 푸른색과 검은색이 섞인 그녀의 눈동자. 마치 깊은 심해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죽고 싶어."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진짜로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녀와 함께 살고 싶었다. 평범하게, 지루하게, 오래오래.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하루도 채 없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넌?"


되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할지. 그녀는 항상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녀가 안정감을 주었다. 마치 오랫동안 익숙해진 습관처럼.

 

-

 

"...내일, 아저씨랑 죽고 싶어요."


도아가 웃으며 몸을 기울여 눈을 감고 그에게 입술을 한 번 맞춘다.


"그리고 지금은.. 아저씨랑 사랑하고 싶어요."


도아가 느릿하게 눈을 떠 그와 눈을 맞춘다.

 

-

 

갑자기 차 안이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말이 내 심장을 찔렀다. '내일, 아저씨랑 죽고 싶어요.' 그녀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시트를 뒤로 젖혔다. 좁은 차 안에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공간이 불편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뜨거웠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입술이 다시 만났다. 이번엔 내가 먼저였다. 차갑고 이성적이던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탐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그녀가 신음했다.
차 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물결. 하늘에는 소행성이 빛나고 있었다. 우리의 죽음을 예고하는 그것이.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절실했다. 그녀의 체온이, 숨결이, 심장소리가.
그녀의 옷자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손끝에 닿았다. 그녀가 떨었다. 차가운 내 손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도아야."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도아가 웃는다. 이름 하나 불러주는 게 뭐라고. 바보 같은 여자. 그 웃음이 날 숨 가쁘게 만든다. 젠장. 내가 그녀에게 더 빨리 다가갔다면 조금 더 이 행복을 오래 즐길 수 있었을까. 바보 같은 후회다.

 

-

 

둘은 또 한 번 몸을 섞고, 차 안에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가 조금 더 달렸다. 한적한 산길 초입부에 차를 세우고 어느새 어둑해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어쩐지 너무나도 밝게 빛나는 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도아는 카메라로 사진을 또 한 장 담는다. 늦은 밤, 슬슬 잠에 들어야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냥 입을 한 번 더 맞춘다.


"아저씨는, 설원회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

 

무덤덤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설원회가 아니었다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상상은 무의미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군인이었겠지. 아버지처럼."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는 걸. 차정혁이 떠올랐다. 내 동생.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마도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어있겠지. 나처럼 살인자가 되지 않았길 바란다.


"난 원래... 군사학교에 가려고 했었어. 하지만... 최하람을 만나고 변했지."


최하람. 그는 내게 새로운 삶을 제시했다. 내가 본 인간 중 가장 완벽한 인간. 난 그에게 충성했다. 그를 따르고자 했다. 만일 내가 그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지금쯤 어딘가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랬다면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넌 뭐가 되고 싶었어?"


되물었다. 사실 궁금했다. 그녀가 꿈꾸던 미래가.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그녀의 대답이. 내가 빼앗은 그녀의 미래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

 

"아하하, 난 작가였어요. 그냥 인터넷에 환상 속 로맨스를 끄적이는 게 다였죠."


도아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진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어요. 내 안의 사랑이 전부 당신이 되는 바람에, 다른 사랑은 상상을 하지 못하게 된 거예요. 난 그게... 너무 행복했어."

 

-

 

그녀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 손길이 마치 독처럼 스며들었다. 작가라고 했다. 환상 속 로맨스를 썼다고. 그래서 그녀는 나를 보며 무슨 이야기를 상상했을까. 아마도 차가운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그런 뻔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그녀의 소설 속 남자주인공처럼 순수하지도, 로맨틱하지도 않았다.


"글을 못 쓰게 됐다고?"


나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꿈을 잃었다. 그녀의 상상력을, 창작욕을, 모든 것을 앗아갔다. 마치 내가 그동안 해왔던 일처럼. 사람들의 목숨을, 꿈을, 미래를 앗아가는 일. 이제와 깨달았다. 나는 그녀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다는 걸.


"도아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행복하다고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나로 채워져서 행복하다고. 하지만 나는 달랐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녀가 나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널 날 전혀 몰라."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그녀가 나를 너무 잘 봤기 때문에 두려웠다. 그녀는 내 안의 어둠도, 고통도,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를 사랑했다. 그게 두려웠다. 나는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문득 그녀가 쓴 글이 궁금해졌다. 어떤 이야기였을까. 아마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겠지. 백마 탄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하는.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왕자가 아닌 살인자였고, 그녀는 내가 구한 게 아닌 스스로 자신을 구했다.

 

-

 

"그럼 더 알려줘요. 아저씨."


도아가 웃으며 그의 뺨에 조금 더 입을 맞춘다.


"아저씨에 대한거요. 전부. 나도 전부 알려줄게요."

 

-

 

그녀의 입술이 내 뺨에 닿았다. 전부 알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위험한 제안이었다. 내 과거를, 내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처럼 순수하게 웃을 수 있을까.


"내가 처음 사람을 죽인 건 열아홉 살 때였어."


갑자기 말이 나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었어. 설원회의 암살팀에 들어가 받은 첫 임무였고, 난 완벽하게 해냈지. 그 이후로 점점 더 많은 임무들에 참여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밤하늘의 별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후로 난 수많은 사람을 죽였어. 때로는 명령에 따라, 때로는 내 판단으로. 모두가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 하지만 결국은 다 핑계였어. 난 그저... 살인자일 뿐이야."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히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엇을 했는지. 모든 것을.

 

-

 

12월 31일 새벽 5시 15분, 종말까지 10시간 42분

 

 

둘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왜 차진혁이 최하람을 따랐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왜 현재의 차진혁이 된 것인지, 우태석이 죽은 이야기, 그냥 사소한 것도, 아무거나. 한도아 역시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 비하면 훨씬 아무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였지만 차진혁은 경청했다. 소행성은 조금씩 더 가까워져간다. 별빛이 흐려지고,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 둘은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곧 영원히 잠들 테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말을 한마디 더 섞는 것이 더 중요했다. 밤을 새워 이어진 서로의 이야기는, 서로를 만났을 적의 이야기로 끝이 났다.


"첫눈에 반했어요. 정말이에요. 아저씨의 얼굴을 보자마자 확신했어요. 아, 난 이 남자를 죽을 때까지 쫓아야겠다. 아마 아저씬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도아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지만, 그 말은 완벽하게 진실이었다.

 

-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 가슴 한켠을 찔렀다. 나는 그때를 기억했다. 3년 전,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복도에서 마주쳤고,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무시했다. 그게 전부였다.


"난 그때 널 죽일 생각이었어."


차갑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그녀가 내 옆집으로 이사 왔을 때, 나는 그녀를 조사했다. 스파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필 내 옆집으로 온 젊은 여자.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며칠 동안 그녀를 미행했고, 조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넌 계속 웃었지. 내가 무시해도, 차갑게 대해도. 매일 아침 인사하고, 커피를 건네고... 바보 같았어."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글을 쓰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고... 그런 평범한 삶.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를 선택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넌 모든 경우에 날 선택했어. 그게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도 모른 채. 내가 살인자라는 걸, 언제든 널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여자를 구하기 위해 널 이용했을 때에도."


말을 멈췄다. 목이 메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후회? 미안함? 아니면 다른 무언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도아가 그의 미소를 보고 눈을 반짝인다.


"사랑하는 걸 어떡해. 이게 내 사랑이에요."


그의 손을 살며시 감싸쥐고, 그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사랑해요. 남은 열 시간도 당신을 사랑할게요."

 

-

 

그녀의 입술이 내 손등에 닿았다. 차가운 내 피부 위로 그녀의 온기가 번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걸었다. 미래도, 꿈도, 생명도.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건 살인보다도 더 잔인한 죄악이었다.


"멍청하군."


차갑게 내뱉었다. 하지만 내 손은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어쩌면 이게 내 방식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차갑게 말하면서도, 결코 놓지 않는 것. 열 시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나를 사랑하겠다고 했다. 마치 그게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인 것처럼.


"이봐, 한도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게 꽤 자연스러워졌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난 그저 더러운 살인자고, 사랑 받을 자격 같은 건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행성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최후를 재촉하듯이.


"하지만..."


잠시 망설였다.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도 남은 시간 동안... 널 사랑할게."

 

-

 

도아의 심장이 그때 잠시 멎는 듯 했다. 도아는 진혁을 사랑했지만, 그에게서 사랑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본인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듣고, 어딘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일주일 뒤 종말이 찾아온다는 뉴스를 봤을 때도, 차진혁이 도아가 아닌 최연서를 선택했을 때도, 설원회에 쫓겨 도망가는 순간에도, 오빠를 두고 차진혁을 선택했을 때도, 그 모든 순간에 언제나 미소짓고 있었던 도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새카맣게 타오르던 까만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다.


"....거짓말."


도아가 눈을 한 번 꽉 감았다가 뜬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거짓말. 아저씨가, 나 같은 걸 사랑할 리 없잖아요."

 

-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봐왔다. 죽기 직전의 공포에 질린 눈물, 고통스러운 눈물, 후회의 눈물... 하지만 그녀의 눈물은 달랐다. 그것은 순수한 사랑으로 인한 눈물이었다.


"'나 같은 걸'?"


차갑게 내뱉었다.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착각하지 마. 네가 먼저 나 같은 걸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럼 나도... 너 같은 걸 사랑할 수 있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서툴렀다.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태석에게 배운 건 사람을 죽이는 법이었지, 사랑하는 법이 아니었다. 최하람에게 배운 건 조직을 움직이는 법이었지, 마음을 전하는 법이 아니었다.


"넌 내가 선택한 거야. 내가 선택한 건 절대 틀리지 않아."


그녀의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차가운 내 손가락이 그녀의 뜨거운 눈물을 닦아내는 게 어색했다.


"이게 내 방식이야.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

 

마음 한 켠이 부서진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찌른다. 도아는 너무나 괴롭고 버거웠다. 도아가 진혁에게 준 사랑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도아는 그의 손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지었다. 더 괴롭고 싶어서.
"싫을 리가 없잖아요. 아저씨 말대로, 아저씨의 선택은 절대 틀리지 않으니까."
둘은 입을 맞춘다. 또 한 번 몸을 섞는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 더 다정하고 거칠게.

 

-

 

종말까지 7시간 42분

 

밤새 이어진 대화와 키스, 그리고 섹스. 그녀의 체온이 내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차가웠는지. 그녀는 내 안의 얼음을 녹이려 했고,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자신의 온기를 모두 내게 주었다.


"도아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땀에 젖은 그녀의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어쩌면 이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는 서로를 선택했다. 죽음이라는 선택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랑이라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내 입술을 더욱 깊이 탐했다. 입술을 떼어내고,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맥박이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증거. 하지만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함께 죽기로 했으니까.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한 것도, 이렇게 약해지게 한 것도 전부 네 잘못이야."


차갑게 말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 방식의 사랑 고백이라는 것을.

 

-

 

"그래요, 내 잘못이에요."


도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아는 카메라를 들어 환하게 타오르는 마지막 태양을 한 장, 둘의 엉망이된 모습을 한 장 더 찍었다. 잠을 못 자서일까, 아니면 그에게 사랑받아서일까, 아니면, 두려워서일까.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었다. 도아는 그것을 가슴 깊이 꾹 누르고, 진혁의 사랑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차에서 천천히 내려 손을 잡고 걸어본다.


"마지막은 산 정상에서 맞이해봐요. 모든 걸 전부 내려다보면서. 분명 좋을 거예요."

 

-

 

그녀의 말에 일어섰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우리의 땀에 젖은 피부를 스쳤다. 그녀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소풍을 가자고 조르는 아이처럼. 하지만 우리가 가는 곳은 죽음이었다.


"산 정상이라..."


고개를 들어 산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점점 더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맑았다. 마치 우리의 최후를 지켜보려는 듯이.


"좋아. 하지만 그 전에..."


차 트렁크를 열었다. 그곳에는 내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무기들이 있었다. 권총, 나이프, 탄약. 설원회를 떠나오면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하나씩 꺼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살인자의 도구들은 여기서 끝이었다.


"이제 가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아니, 어쩌면 내 손이 차가운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산길을 오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라고.

 

-

 

한겨울 산속은 눈에 뒤덮여있었고, 꽃 한 송이 피어있지 않았다. 동물들도 겨울잠에 빠져 오로지 진혁과 도아 뿐이었다. 어쩐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도아는 하얀 산길을 따라 발자국을 내며 위로 올라간다. 종종 미끌어져 비틀대더라도, 진혁이 옆에서 꽉 잡아주고 있으니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도아는 종종 뒤를 돌아 사진을 찍었다. 진혁과 도아의 발자국이 남은 거리를. 그리고 사랑하는 진혁의 얼굴을. 사진을 찍고 나면 진혁의 손을 한 번 더 강하게 쥐었다.

 

-

 

"우리가 남긴 흔적은 어차피 사라질 텐데."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의 발자국은 곧 새로 내리는 눈에 덮일 것이다. 아니면 소행성이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이다. 여전히 그녀가 사진을 남기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어쩐지 멈추게 하고 싶진 않았다.


"...계속 찍어."


무심한 듯 말했지만, 사실 그녀가 찍은 사진들이 궁금했다. 우리의 발자국. 설원 위에 남은 우리의 흔적. 마치 우리의 지독히도 짧은 사랑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처음이야."


불현듯 말이 나왔다.


"이렇게 산에 오르는 것도, 누군가와 함께 죽으러 가는 것도... 전부 처음이야."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넘어지지 마. 아직 죽을 때가 아니야."


하얀 눈밭 위로 찍히는 그녀의 발자국을 보았다. 작고 불안정한 자국들. 마치 우리의 관계처럼. 그녀가 휘청거릴 때마다 본능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했다. 내가 언제부터 누군가를 이렇게 지켜본 적이 있었나.

 

-

 

한시간 즈음이 더 흘렀다. 도아의 숨이 차오른다. 머리가 어질해진다. 며칠간 누적되었던 피로, 전날 밤을 새운 것,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래 움직이는 것은 도아에게 꽤나 벅찬 일이었다. 도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속도가 느려지자, 진혁이 잠시 걸음을 멈춘다. 정상까진 조금 더 남았다.


"...미안해요, 아저씨. 내가 체력이 안 좋아서."

 

-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피로가 쌓여있었다. 당연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앉아."


단호하게 말했다. 눈 위에 내 코트를 펼쳐 깔았다. 그녀를 앉히고, 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냈다. 설원회에서 임무 수행할 때 항상 가지고 다니던 것이다. 체력 보충용으로.


"먹어. 당이 떨어지면 안 돼."


초콜릿을 그녀의 입술 앞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한 입 베어물었다. 그녀의 입술이 내 손가락에 스쳤다. 차가웠다.


"미안할 것 없어. 내가 네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거야. 난... 혼자 움직이는 데 익숙해서."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좀 쉬다 가자. 아직 시간은 충분해."

 

-

 

도아가 그의 몸에 살짝 기댄다. 그리고 숨을 몰아쉰다.


"....잠들 것 같아요. 안되는데. 난 잠들기 싫어요."


도아가 초콜릿을 우물대며 중얼인다.


"맛있다. 달아요."

 

-

 

그녀가 내 몸에 기대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체온이 평소보다 낮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의 피로는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달다고 했다. 그녀의 입술 끝에 초콜릿이 묻어있었다. 손가락으로 닦아주려다 멈췄다. 이런 다정함이 아직도 어색했다. 잠들 것 같다고 했다. 그래, 잠들면 안 된다. 우리에겐 얼마 남지 않은 시간뿐이니까.


"잠들지마."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체온을 나눠주기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잠들면... 난 널 깨우지 않을 거야. 그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니잖아."


주머니를 뒤적여 남은 초콜릿을 전부 꺼냈다. 세 개가 더 있었다. 원래는 임무 수행 중 비상용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의미 없었다.


"전부 먹어. 정상까지 가려면 힘이 필요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행성은 이제 맨눈으로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5시간 27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를 살려두기 위해, 나는 차가운 명령조로 말을 이었다.


"먹고, 일어나. 우리는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어."

 

-

 

도아는 힘없이 웃으면서 초콜릿을 우물거렸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 속에 숨겨진 걱정과 사랑을 어쩐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아는 그게 좋았다. 자칫하다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한 번 더 웃고, 몸을 일으키려다 휘청였다. 진혁이 그를 받아주었다.

 

-

 

그녀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너무 가벼웠다. 마치 깃털을 잡은 것처럼.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 숨겨진 뭔가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물? 아니면 두려움? 그녀의 감정을 읽으려 노력하는 내가 낯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등을 돌렸다.


"업혀. 네 체력으로는 정상까지 못 갈 거야. 시간 낭비하지 말자."


잠시 망설임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마도 내 제안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다렸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를.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가벼운 몸이 내 등에 닿았다. 그녀의 체온이 내 등을 데웠다. 이상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따뜻함을 허용하게 된 걸까.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온기가 영원히 식어버릴 거라는 것을. 우리가 선택한 결말이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팔로 내 목을 감아. 단단히."


명령하듯 말했다. 그녀의 팔이 내 목을 감쌌다. 너무 약했다.


"더 세게. 떨어지면 안 돼."


그녀를 업고 걷기 시작했다. 눈 위를 걸을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마지막 흔적이 될 소리. 그녀의 숨결이 내 귓가에 닿았다.

 

-

 

도아가 그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작게 웃음소릴 흘린다.


"저 무거워 하실까봐 부끄러워요."


세상이 멸망하는 와중에 말하기엔 별 것 아닌 고민거리였다.


"...그래도, 너무 좋다. 아저씨가 업어 주는 거."

 

-

 

그녀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무겁다니. 그녀는 내가 업어본 것들 중 가장 가벼웠다. 설원회에서 나는 시체를 업어 나른 적도 있었다. 죽은 자들은 무거웠다.


"무겁지 않아."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덧붙였다.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야. 뭘 먹고 살았길래 이 정도야."


그녀의 팔이 내 목을 더 단단히 감쌌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등에 전해졌다. 불규칙적이었다. 피로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업히는 게 뭐가 좋다고. 한심하긴."


냉담한 말투였지만, 발걸음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녀의 체온이 내 등을 데웠다. 이상했다. 차가운 겨울 산 정상을 향해 가는 중인데, 등이 따뜻했다.


"말이 많아졌네. 피곤한 게 풀린 모양이군."


그녀의 숨결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간지러웠다. 불편했다. 하지만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눈 위를 걸었다. 발자국 소리가 마치 시계 초침처럼 규칙적으로 들렸다. 틱, 톡.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세는 것 같았다.

 

-

 

한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무렵, 정상에 도착했다. 진혁은 그녀를 벤치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하늘이 아름다웠다. 도아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조금 부비적댄다. 그리고 한 장 더 사진을 찍었다. 둘의 모습이 같이 나오도록.


"아저씨, 술 마실래요? 내가 하나 챙겨왔는데."


도아의 꽤 무겁던 가방에는 위스키 하나가 들어있었다. 한참 예전에 진혁의 집에서 나올 당시 챙겨놨던 것이다.


"춥잖아요. 따듯해져요."

 

-

 

종말까지 3시간 54분

 

위스키 병을 바라보았다. 한도아가 이런 것까지 준비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나는 술을 딱히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4시간 후면 모든 게 끝날 텐데.


"마시자."


병을 받아들었다. 병마개를 돌려 열었다. 위스키 특유의 향이 코끝을 찔렀다. 첫 모금을 마셨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그래, 이래서 술을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불편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옆에서 괜히 웃고 잇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젠장, 따뜻해지긴 무슨."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녀에게 건넸다. 우리는 같은 병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간접키스라고 하던가.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행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무겁게 여기까지 들고 오기나 하고. 하여튼 넌 바보같은 여자야."


또 퉁명스러운 말투로 중얼인다.

 

-

 

도아는 술을 한모금 마시고, 웃으며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춘다. 추위 탓에 얼어붙은 둘의 입술에선 위스키의 씁쓸한 향이 퍼졌다.


"바보같다뇨. 아저씬 그 바보같은 여자한테 사랑한다고 해놓고."


도아가 술병을 내려놓고 그의 손을 꽉 잡는다.


"한 번 더 말해줘요. 사랑한다고."

 

-

 

그녀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위스키 맛이 섞인 키스였다.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했다. 이상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술을 가져온 거야?"


냉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내 손도 차가웠다. 우리는 서로의 차가운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난 역시, 그럴만한 자격은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행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비웃듯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나는 그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목소리가 낮아졌다.


"사랑해."


차갑고 건조한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런 감정도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와 함께.

 

-

 

도아가 웃는다. 그리고 답한다. 나도 사랑한다고. 언제나 그랬듯이. 둘은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며 종종 입을 맞추다가, 문득 도아가 카메라를 꺼내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들을 보여준다.
첫번째 사진은 진혁의 집이었다. 최연서를 구하기 위해 태온에 들어갔다가 실패한 후, 도망쳐온 진혁의 집. 진혁의 셔츠를 빌려 입고 하루 잠든 후 다음날 아침. 함께 커피 한 잔을 하고는 짐을 챙겨 강릉으로 도주하기 직전. 여러 짐이 널려있는 곳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진혁과 웃고있는 도아가 있었다.
다음 사진은 진혁의 차 안. 역시나 웃고 있는 도아와, 주변을 경계하며 운전하는 진혁의 모습이 보인다. 그 다음은 휴게소에서 도아가 반쯤 강제로 핫도그를 진혁에게 먹이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뒤로도 차 안에서 강릉 까지의 바깥 풍경 사진들이 이어졌다.
다음 사진은 강릉의 은신처 사진들. 아주 오래 비어있던 곳이기에 먼지로 엉망이 된 장소, 그리고 진혁과 함께 청소하는 모습, 청소 후 깨끗해진 사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함께 일출을 보는 사진. 코트만 입으려던 진혁에게 억지로 도아가 담요를 둘둘 말아준 것이 떠오른다. 태양빛에 비춰진 서로의 모습이 담겨있다.


"아, 이날 정말 좋았어요. 일출이 이렇게나 예쁜 줄은 몰랐어."


도아가 사진들을 넘기며 작게 웃는다.

 

-

 

사진들을 보는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녀는 마치 보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사진들을 넘기고 있었다. 우스웠다. 내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순간들이었는데, 그녀는 그것들을 전부 소중하게 담아두었다. 특히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진들을 보며 더 밝게 웃었다.


"그런 걸 왜 찍었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사진들이 계속 넘어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휴게소에서 핫도그를 먹이려 했던 순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는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한 입 베어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맛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기뻐하던 얼굴만이 선명하다.
사진 속 나는 늘 찡그리고 있었다. 경계하고, 의심하고, 살피는 표정이었다. 반면 그녀는 늘 웃고 있었다. 마치 도망자의 신세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것조차 행복했던 걸까.


"일출이 예쁘긴. 그냥 자연현상일 뿐인데."


차가운 분석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날 아침을 기억한다. 그녀가 억지로 둘러준 담요의 온기를.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 아래서 그녀가 지었던 미소를.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했던 그 표정을.


"사진이란 건 의미 없어. 어차피 곧 모든 게 사라질 텐데."


말은 했지만, 시선은 계속해서 사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내가 몰랐던, 혹은 무시했던 순간들. 그녀는 그것들을 전부 기록해두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서처럼.

 

-

 

몇 십 분이 지나도록, 도아의 사진들은 이어졌다.
함께 마신 커피, 식사 사진들. 모래사장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걸었던 사진들. 엉망으로 머리가 흐트러진 도아, 그걸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진혁의 얼굴. 그리고 춥다는 말에 처음으로 도아를 껴안아준 진혁. 포옹은 계속되어, 서로를 끌어안은채 잠들었던 그날 밤.
밤하늘을 올려다본 날의 사진. 다음날 눈이 내리자, 함께 눈싸움을 했던 사진. 진혁의 까만 코트에 엉망으로 얼룩진 흰 눈. 도아가 만든 작고 하찮은 눈사람 두 개. 담요에 들어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사진. 그리고, 결국 도아의 사랑을 전부 받아들이기로 한 진혁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입맞춘 날. 몸을 섞은 날. 다음날 엉망이 된 채로 함께 샤워를 했던 것.
기억들이 멋대로 떠오른다. '아저씨, 행복해요?' '행복해.' 진심을 담았던 아주 짧은 대화. 도아의 손이 조금씩 떨린다. 이제 고작 두시간 남짓 남았다. 멸망까지.

 

-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사진들은 계속해서 넘어갔다. 그녀가 찍은 사진들은 마치 일기장 같았다. 우리의 모든 순간을. 심지어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순간들까지. 그녀는 전부 담아두었다. 그리고 지금, 그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무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특히 그녀가 웃는 사진들을 볼 때면 더욱 그랬다.


"이제 그만."


차갑게 말했다. 카메라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울지 마.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오지 않았다.


"이런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 없어. 이제 두 시간 밖에 남지 않았잖아."


하늘을 가리켰다. 소행성은 이제 달만큼이나 커다랗게 보였다. 마치 우리를 삼키려는 듯이. 그녀의 손이 더욱 떨렸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단단히.


"그래도... 그때는 행복했어."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네가 만든 하찮은 눈사람도, 밤하늘도, 일출도, 일몰도. 전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

 

도아는 사진들을 계속해서 넘겼다.
전날, 정처없이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빙한 것. 그러다 우연히 도착한 이 산. '아저씨, 하고 싶은 거 없어요?', 라는 도아의 말에, 진혁이 '죽고싶다'고 답했던 것. 속으로는 '그녀와 함께 살고 싶었다. 평범하게, 지루하게, 오래오래.'하고 생각했던 것. 도아는 자꾸만 진혁의 심장을 찌르는 사진들을 보여줬다. 아마 도아 스스로도 찌르고 있을 것이다.
차 안에서 바라본 하늘. 커다란 소행성. 산길을 오르며 도아가 찍어온 사진들. 그리고, 방금 막 찍은 정상에서의 사진. 그것으로 도아의 카메라는 마지막 장에 도달했다.


"아저씨."


도아가 카메라를 끄며 그를 바라본다.


"삶의 마지막에, 날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날 사랑한다해줘서 고마워요. 나와 함께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한시간 삽십 분 뒤. 세상은 멸망한다. 공평하게 모두가 죽는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선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할지, 누구와 함께 있을지. 도아의 선택은 역시나 진혁이었다.

 

-

 

종말까지 1시간 30분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가슴을 찔렀다. 감사하다니.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고 가녀린 어깨, 창백한 얼굴, 그리고 늘 웃음 짓던 입술. 이제 그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네가 선택한 거야."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평소와 달랐다.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난 그저... 네가 날 선택했고, 날 사랑했고... 그래서 난..."


말을 멈췄다. 갑자기 모든 게 선명해졌다. 그녀가 왜 이토록 오랫동안 나를 지켜봤는지. 왜 그토록 끈질기게 사랑한다 말했는지. 그녀는 내 안의 무언가를 보았던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한, 혹은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아니, 취소할게."


짧게 입을 한 번 꽉 다물고, 눈을 손으로 덮는다. 괜히 큰 숨이 내뱉어진다.


"네가 나를 선택한 게 아니야. 내가 널 선택한 거지. 그리고 그건..."


잠시 말을 멈췄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옳은 선택이었어."

 

-

 

그의 말에, 도아가, 기어코 눈물을 터뜨린다. 표정이 엉망이다. 참을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눈물이 흐른다. 도아가 그를 꽉 끌어안고, 쉼없이 입을 맞춘다.


"사랑해요, 아저씨. 사랑해요."


도아가 흐느끼며 속삭인다. 추위 때문인지 감정 때문인지 몸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도아가 점점 더 그의 품에 깊게 파고들며 눈물을 흘린다. 조금씩, 조금씩 더, 소행성은 가까워진다.

 

-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눈물이란 건 늘 불편했다.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 그것도 슬픔이라는 가장 무력한 감정의.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눈물이 내 셔츠를 적시는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울지 마."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등이 떨렸다. 마치 깨질 듯이. 내가 그녀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부서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네가 그렇게 울면... 나도..."


말을 삼켰다. 나도 울 것 같다고 말하려다 멈췄다. 그런 말은 내 입에서 나올 수 없었다.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하늘은 점점 더 붉어졌다. 마치 피를 머금은 것처럼.


"한도아."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진작에 더 불러줄 걸. 3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불러줄 걸. 아니, 그 전에 만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갈 걸.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내가 먼저 널 찾을게."

 

-

 

도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춘다. 또다시 눈물을 터뜨린다.


"아저씨, 아까까진 정말 안 무서웠는데. 아저씨랑 같이 있으면 죽어도 괜찮았는데.."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그의 양 뺨을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쥔다.


"무서워요. 죽기 싫어요. 아저씨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 아직, 아직 너무 못해본 게 많아. 아저씨랑 같이 봄을 맞이하고 싶어요. 벚꽃을 구경하고 싶어요. 여름엔 함께 수영장에 가고 싶어요. 가을엔 단풍놀이를 가고, 겨울엔 저번처럼 다시 한 번 더 눈싸움을 하고싶어요."


눈물 탓에 뚝뚝 끊기는 목소리와 웅얼대는 발음이었지만, 적어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

 

그녀의 손이 내 뺨에 닿아있었다. 차가웠다. 아니, 내 피부가 뜨거웠던 걸까. 그럼에도 그녀의 눈물은 마치 용암처럼 타올랐다. 그녀는 지금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그토록 당당하게 나를 쫓아다니던 그녀가. 그토록 담대하게 나의 어둠을 받아들이던 그녀가.


"봄이라..."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가 말한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벚꽃 아래에서 미소 짓는 그녀. 수영장에서 물장구치는 그녀. 단풍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아래 서 있는 그녀. 하얀 눈 속에서 까맣게 젖은 머리카락을 흔드는 그녀. 그 모든 모습이 선명했다. 너무나도 선명해서 가슴이 아팠다.


"한도아, 난.."


그녀의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녀의 얼굴이 내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이토록 작은 얼굴이었나. 아니면 내 손이 컸던 걸까. 문득 우스웠다. 이제 와서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다니.


"나도 그래."


말을 멈췄다.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의 얼굴이 흐릿했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 곧 모든 게 끝날 텐데. 진실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너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었어. 아침에 일어나면 네가 만든 커피를 마시고. 퇴근하면 집에서 널 기다리고. 주말엔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여행도 가고. 그런...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행성이 더욱 커져있었다.

 

-

 

도아가 눈물 속에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솔직한 말을 들은 것이 와중에도 기뻤다.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일어나는 차진혁, 우울해하면서도 커피를 홀짝이는 차진혁, 퇴근 후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것, 귀찮아하면서도 주말마다 자신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줄 차진혁.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아쉬워서, 미련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다 무용하겠지. 코앞까지 다가온 저 소행성 앞에선.
꽉 끌어안고, 입술을 맞춘다. 눈물을 닦아준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손을 잡는다. 그게 남은 시간동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간은 마구 흐른다. 도아가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본다.


"마지막 얼굴은 예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엉망이 되어버렸네요. 아쉬워라."


뺨엔 눈물 자국, 새빨갛게 부어오른 눈, 창백한 피부를 한 도아가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그를 바라본다.

-

 

종말까지 15분

 

그녀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내렸다. 예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니.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름다웠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손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눈물자국이 선명한 뺨을 엄지로 쓸었다. 새빨간 눈가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창백한 피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넌 지금...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워."


솔직했다.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놀란 듯했다. 당연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네가 처음으로 내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난 늘... 네가..."


말을 멈췄다. 목이 메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적이고 싶었는데. 차갑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한도아. 난 네가 처음부터 아름다웠어."

 

-

 

"...날 또 울리지 말아요."


도아가 입술을 꽉 물며 울음을 참아내고, 어떻게든 웃어보인다. 웃는 얼굴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아저씨도,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워요.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서로를 바라본다. 소행성은 점점 가까워져 하늘을 뒤덮으려 한다. 둘은 그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린다. 서로만을 바라본다.

 

-

 

종말까지 5분

 

그녀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시려왔다. 마지막까지도 날 생각하는 그녀가 우스웠다. 아니, 서글펐다. 웃으려 애쓰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늘 그랬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떨리거나, 씰룩거리거나, 한순간에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지금처럼.


"넌 참 이상한 여자야."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온이 내 품 안에서 따뜻했다. 이제 곧 이 온기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난 네가 싫었어. 네가 보여주는 모든 감정이 거짓말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알아. 넌 그저... 진심이었던 거야.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거지."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소행성의 그림자가 우리를 덮쳐왔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이마를 맞댄다.


"다음 생에는... 내가 먼저 널 사랑하게 해줘."

 

-

 

종말까지 1분

 

도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열기가 느껴진다. 곧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 도아가 그의 허리를 감싸안는다.


"아니, 분명 내가 아저씨를 또 먼저 사랑하게 될 걸."


어쩐지 확신하는 말투였다. 도아의 순수한 사랑이, 진혁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그를 엉망으로 만든다.


"차진혁."


단 일 분. 일분이면 소행성은 이곳을 휩쓸어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도아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저씨가 아닌, 차진혁이라는 이름 석자를.


"사랑해, 차진혁."

 

-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저씨가 아닌, 차진혁이라는 이름을.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가 왜 그토록 내 곁을 맴돌았는지. 왜 그토록 끈질기게 사랑한다 말했는지. 그녀는 내 안의 진짜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차진혁이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난..."


목소리가 떨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적이고 싶었는데. 차갑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가면이 무너져내렸다.


"나도 사랑해, 한도아."


30초. 이제 30초면 모든 게 끝난다.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소행성의 열기가 피부를 태웠다. 하지만 나는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모습을. 차진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마지막 순간을.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마지막 10초. 나는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빠르게, 하지만 힘차게 뛰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처음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널 찾을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그리고 내 눈동자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마지막이 되리라. 소행성이 만들어낸 붉은 빛이 우리를 감쌌다. 뜨거웠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내 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제 5초. 4초. 3초.
나는 그녀의 입술에 마지막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다음에는 더 일찍 만나자."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함께였으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

 

후기

어제부터 이틀간 정말정말 재밌게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너무 과몰입해서 재밌게했네요.. 한 세번 울었음ㅠ

순애에 정신 놓아가는 차진혁 보는 것도 재밌었고...

차진혁 특유의 건조하고 딱딱한 말투가 최후의 최후까지 이어진 거 같아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손수 고친 것도 많긴하지만..ㅎㅎ)

너무 재밌는 설정 만들어주신 사먁님 완전 완전 감사드립니다🥺💞💗

 

 

몇몇 대사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읍니다..

갠적 베스트를 뽑자면..

 

"참지 마."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명령이 아닌 허락이었다. 내가 그러길 바랐다.
"죽고 싶어."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진짜로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녀와 함께 살고 싶었다. 평범하게, 지루하게, 오래오래.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하루도 채 없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착각하지 마. 네가 먼저 나 같은 걸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럼 나도... 너 같은 걸 사랑할 수 있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서툴렀다.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태석에게 배운 건 사람을 죽이는 법이었지, 사랑하는 법이 아니었다. 최하람에게 배운 건 조직을 움직이는 법이었지, 마음을 전하는 법이 아니었다.
"아니, 취소할게."
짧게 입을 한 번 꽉 다물고, 눈을 손으로 덮는다. 괜히 큰 숨이 내뱉어진다.
"네가 나를 선택한 게 아니야. 내가 널 선택한 거지. 그리고 그건..."
잠시 말을 멈췄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옳은 선택이었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의 얼굴이 흐릿했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 곧 모든 게 끝날 텐데. 진실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너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었어. 아침에 일어나면 네가 만든 커피를 마시고. 퇴근하면 집에서 널 기다리고. 주말엔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여행도 가고. 그런...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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